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멋대로 Jan 24. 2024

'회의'에 대한 짙은 회의

2. 회사와 나, 우린 제법 안 어울려요



“자, 그럼 얘기해 볼까?”



전 팀원이 모인 회의실. 마지막으로 들어온 팀장이 회의 시작을 종용하며 빈 자리에 걸터앉는다. 눈치 게임 시작이다. 짧은 시간, 모두 눈을 내려깔고 슬금슬금 타이밍을 잰다. 펜을 쥐고 애먼 수첩을 내려다보고 있다. 다들 주저하는 틈에 에라, 하고 내가 나선다. 먼저 매 맞고 치우자는 전략이다.



“그럼 저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제가 생각해 본 건 일단 이런 내용입니다.”



준비해 온 자료를 회의실 스크린에 띄운다. 화면을 보면서 내가 생각한 ‘1안’에 대해 설명한다.



“그래? 그럼 이렇게 갔을 때 돌발변수가 생기면 그땐 어떻게 하려고?”



팀장의 반문이 곧바로 따라붙는다.



“아 그것까지는 아직 생각을 못 해봤는데요, 그래도 방향성만 보자면….”



“흐음. 다른 건?”



“어, 또 이런 게 있는데요.”



반응이 역시나 탐탁찮아 다음 안을 곧바로 내민다. 팀장이 기다렸다는 듯 또다시 빠르게  잘라 낸다.



“이렇게 하는 게 딱히 뭐 의미가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해? 내가 이상한가?”



침묵이 이어진다. 의사결정권자가 부정 의견을 내비쳤다. 다른 팀원이 내 의견에 찬조하는 분위기가 형성될 리가 없다. 어쨌거나 준비한 내용을 다 털기 위해 마지막으로 용기를 내어 3안을 내놓는다.



“그럼 혹시 요런 느낌은 어떨까요?”



“음, 이렇게 하면 그거 세팅은 누가 할건데? 너 혼자 다 할 수 있어? 골치 아플텐데. 그게 될까?”



이번에는 팀장 바로 밑 과장이 나서서 칼질을 한다. 얄짤 없다. 쩝, 하고 내가 멋쩍게 물러나면 다른 팀원이 나와 같은 절차를 밟는다. 의견을 내 놓고, 까이고, 찌그러진다. 이제 팀장의 마무리 멘트만 남는다.



“자. 그러면 일단 이 건은 그냥 내가 저번에 말한 방향으로 하자. 그게 제일 나을 것 같네. 여기까지 하고 OO이는 어제 얘기한 거 마무리해서 오후까지 나 갖다 주고. 오케이.”





‘회의를 왜 한 거야 이럴 거면.’ 소리 없는 불만이 회의실에 조용히 한가득하다. 회의랍시고 자리를 열 번 가지면 여덟아홉은 이런 식이다.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르는 인원은 팀장과 그의 꼭두각시 과장 뿐이다.


아니, 알면서도 외면하는 게 분명하다. 그 쪽이 (본인들에게) 편하고 (본인들에게만)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아이디어 정리에 들인 하루하고도 반나절의 시간이 또 한 번 의미 없이 날아갔다. 미뤄두었던 업무가 빠끔히 존재감을 드러낸다.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에 자괴감마저 든다. 거듭할수록 허탈함만 남기는 의미 없는 회의에 이골이 난다.


회의란 기본적으로, 여러 사람이 의견을 모으는 일 아니던가. 나아가서는 각양각색 의견을 모아 뜯어 보고 합해도 보며, 한 개인이 내놓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뛰어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과정이어야 한다.


위 개념에 부합하는 참다운 회의가 가능하려면, 회의 참여자 모두 기본적으로 견지해야 할 태도가 있다. 첫째, 모두가 자유롭게 의견을 표현할 수 있도록 존중할 것. 둘째, 한 의견에 대한 즉각적인 반론과 비판은 피할 것. 셋째, 섣불리 결론을 내려고 하지 않을 것.


그런데 이곳 회의실 안에서는 셋 중 어느 한 가지도 찾아볼 수 없다. 존중 대신 의견의 편중이, 한 마디 끝내자마자 달겨드는 반론과 비판이, 섣부른 결론이 난무한다.


회의의 긍정적 속성을 가장 잘 끌어내는 ‘브레인스토밍’도 일절 없다. 브레인스토밍을 하려면 마인드맵처럼 한 주제로부터 자유로이 생각을 뻗어나가야 한다. 현실은, 가지 하나를 새로 뻗을 때마다 전지가위를 든 ‘짬밥’ 인원이 재깍재깍 잘라 버리기에 바쁘다.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팀에 있는 동안 단 한번이라도 회의다운 회의를 해 본 적 있었나. 아니라는 결론을 곧바로 도출해 낸다. 회의가 아니라 전부 보고 형식이었다. 팀장이 우리 저번에 말 나온 건에 대해 각자 생각해 와서 이야기 좀 해보자는 식으로 회의 일정을 잡는 것은 정해진 시간 내로 괜찮은 아이템 갖고 와서 보고할 준비를 하라는 말과 같다.


회의를 빙자한 보고가 시작되면, ‘팀장 마음에 들 만한 의견 말하기 대회’로 점점 정체성이 바뀌어 간다. 눈치껏 팀장의 마음을 읽어내야 승자다. 팀장의 시선과 입장에서, 거의 팀장에 빙의하다시피 한 아이디어를 꺼내놓는 인원이 좋은 점수를 받는다.


팀장이 설정한 방향성에 반하는 의견은 함부로 낼 수 없다. 소신을 갖고 발언하거나 눈치껏 행동하지 못하면 핀잔이 따른다. 결과적으로 팀원 모두가 자기검열에 빠진다. 사서 욕 들을까 무서워서다. 갑작스럽게 회의가 소집된 경우에, 누구도 먼저 나서서 자기 의견을 내놓으려 하지 않는 이유다.





가끔은 어쩌면 내 시선이 지나치게 삐딱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러한 방식이 이 팀만의 고유한 속성이겠거니 하고 넘겨버리고 싶다.


진짜 문제는, 이만큼 딱딱한 틀을 만든 장본인께서 나를 포함한 팀원들에게 ‘창의성’을 바란다는 것이다. 맡은 일이 콘텐츠 생성이라면 그에 맞게 창의적인 결과물을 꺼내 놓으라는 압력이다. 따지고 보면 황당하고 무리한 요구가 아닐 수 없다.


창의성은 자유로운 생각에서 나온다. 자유로운 생각은 편안한 분위기를 전제한다. 물론 모든 업무 환경이 이상적일 리 없다. 그럼에도 가장 기본적인 성질은 갖춰야 하는 법이다. 축구를 시키려거든 잘 관리된 잔디밭까지는 아니더라도 마땅한 운동장을 내 줘야 하고, 수영을 하게 하려면 최소한 물가에 데려가 줘야 한다. 상식적으로 그렇다.


그런데 생각이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없는 환경에서 창의적인 결과물을 바란다니, 콘크리트 바닥에서 수영해 보라는 격이다. 그 다음 이어지는 질타는 꼭 이런 식이다.


너 수영 선수였다며. 내가 너 수영모랑 수영복이랑 물안경 줬잖아.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 너도 알다시피 우리 회사는 수영장 같은 건 만들어 줄 수가 없어. 헤엄칠 방법은 네가 알아서 강구해 봐야지.





콘텐츠 에디터인 나에게 자유로운 의견 개진이 가능하고 적절한 콘텐츠 회의가 이루어지는 환경은 필요불가결하다. 여기서는 아무도 그 필요성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럴 틈 없이 모두 자신만의 격무에 매몰돼 있다.


잡지사에 있을 때는 아이디어 회의란 상식에 가까운 일이었다. 매달 정기적인 아이템 회의를 최소한 서너 차례 진행했다. 편집팀의 팀장인 편집장은 회의 때 가이드라인을 설정해서 적절한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도록 돕고 살을 붙여 주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창의성을 끌어낼 만한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았다. 팀장-팀원 관계 역시 사장-사원 관계의 축소판에 다름 없는 수직 구조였다. 신선한 생각이 나올 리 만무한 배경이다. 대표나 사장이나 팀장이나, ‘장’들은 수치 및 결과물을 보고 최종 결재만 할 뿐 결과를 끌어내는 과정에는 관심이 없다.


결정권이 없는 나로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팀장 입맛에 맞는 콘텐츠를 생각하는 데 그치게 된다. 기획 단계서부터 내 생각과 의도를 어필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결과물에 대해 ‘오케이’와 ‘노’라는 답을 받을 뿐이다. 구조적 불합리에 답답함이 커진 나머지, 팀장에게 답답한 마음을 직접 표출해 보기도 했다.



“팀장님, 저는 콘텐츠를 기획하고 또 풍성하게 만드는 사람이어야 하잖아요. 그러려면 보고와 컨펌 형식이 아닌 자유로운 아이디어 회의가 필요합니다. 의사결정권자이신 팀장님까지 아이디어 개진 단계에서부터 함께하는 식의 아이템 회의 시간을 정기적으로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회심의 시도는 다른 때처럼 씨알도 먹히지 않은 채 끝났다. “나도 아이디어 회의에 참여하라고? 하하.”라는, 별 웃기지도 않은 말을 다 한다는 투의 답을 들었을 뿐이다.


아래에서 위로 의사를 개진할 통로가 완전히 막힌 듯한 환경. 진중한 건의를 가볍게 뭉개기 쉬운 관계와 구조.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는 회의란 앞으로도 절대 없을 것만 같은 짙은 회의.


불쾌한 기시감에 휩싸였다. 같은 감정을 몇 번이나 더 소모해야 하고, 여기에 대한 분통을 대체 몇 차례나 혼자 삭여야 할까. 한참을 가만히 엎어 두었던 인내심의 모래시계가 서서히 뒤집어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전 14화 만성피로에 명약은 딱 하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