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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흔적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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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멋대로 Oct 27. 2024

흔적 (5)

5.


보경은 그 싸늘한 파장을 '그늘'이라 칭했다. 허상 같은 실체였다. 감은 눈꺼풀 위를 서성이는 빛처럼 직접 보지 않아도 피부에 와 닿았다. 신기라든지 초능력 같은 것과는 달랐다. '그늘'이 주파수라면 자신은 남들보다 수신 폭이 조금 더 넓을 뿐이었다. 그늘은 감각의 끄트머리에 매달려 새벽같이 찬 공기를 보경의 살갗에 갖다 대었다. 매끈한 표정으로 단단한 체 했다. 민혁 방의 냉장고와 다를 바 없었다. 겉은 멀쩡해 보여도 차갑고 상한 것이 그 안에 들었고 썩은내를 풍겼다. 인간의 거죽은 죽을 의지를 완벽히 차폐하기에는 얇았다. 얕았다. 보경은 그 막을 꿰뚫어볼 줄 알았다. 누가 보더라도 뭐 마려운 얼굴을 한 사람은 보경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양지발라 보이는 응달. 평온을 가장한 사람을 알아봐 주어야 했다. 더 위험한 쪽은 그쪽이었다. 현정도 그런 아이였다. 병원을 나온 이후로 보경은 자기 역할을 분명히 알았다. 



현정은 조용했다. 눈에 잘 띄지 않았고 이따금 조용히 무모했다. 중학교 삼 학년 2학기 중간고사를 열흘 앞두고 현정은 자신이 이번에 전교 오 등 안에 들 거라고 했다. 체육복을 갈아입으러 복도 끝 탈의실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현정은 공부를 잘 하는 편이 아니었다. 반에서 중하위권에 머무르는 성적이었지만 빤빤한 얼굴을 했다. 농담으로 꺼낸 말 같지 않았다. 보경은 어떻게, 가 아니라 왜, 냐고 했다. 왜 그렇게 하고 싶은지 물었다. 현정이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겠다고 했다. 그냥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거라면 아빠가 좋아할 거야. 과고든 외고든 갈 거야. 그러고는 몇 번 넘겨본 흔적 없이 반들반들한 참고서를 여보란듯 자리 왼편 창틀에 쌓아 올렸다. 며칠간 점심도 제대로 먹지 않고 다리를 달달 떨면서 책을 들여다 봤다. 보경이 뒤에서 볼 땐 현정이 책을 붙든 시간보다 창 밖을 내다보거나 엎드려 자거나 음악을 고르거나 안경을 닦거나 화장실에 들락거리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중간고사가 시작되고 사흘째 되는 날까지 현정은 꼬박 밤을 샜다고 했다. 한 번씩 고개를 젖히고 콧구멍에 휴지를 돌돌 말아 꽂았다. 시험기간 마지막 날이 되었다. 현정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 뒤로 하루를 나오고 또 하루는 안 나왔다. 주말을 보내고 나타난 현정은 다시 조용해졌다. 보경은 현정과 점심을 먹었다. 괜찮냐고 물었다. 괜찮다고 했다. 하나도 그래 보이지 않았다. 현정의 그늘은 여름방학 이후로 하루하루 짙어졌다. 보경이 다니던 여중에는 별의 별 아이들이 많았다. 눈썹칼로 자기 팔을 가로로 죽죽 그어 빨래판처럼 상처를 내던 아이도 있었다. 온라인으로 스무 살 스물 한 살 오빠들을 만나서 술 먹고 몸을 굴린다는 소문을 가진 아이도 있었다. 결핍이 있는 아이들이었다. 그렇지만 현정과 같은 그늘은 보이지 않았다. 요란한 결핍에는 어떤 식의 반응이라도 따르곤 했다. 조용한 현정을 둘러싼 환경과는 대조적이었다. 현정에게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겉보기에 얌전하고 말 수 적은 아이에 불과했다. 시선이 닿지 않는 사각에서 지나치게 떠오르거나 지나치게 가라앉기를 저 혼자 반복해 왔다. 학년 초부터 현정을 지켜본 사람은 보경 뿐이었다. 보경은 적당히 현정의 주위를 맴돌았다. 말을 걸었다. 같이 밥을 먹었다. 종종 함께 하교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한 달이 지났을 때 집에 돌아가면서 보경은 현정에게 어느 고등학교에 가고 싶냐고 새삼스레 물었다. 현정은 글쎄, 이제는 별 관심이 없다고 했다. 어디든 가면 가겠지, 아무래도 상관 없다면서 대수롭지 않은 척 미소지었다. 보통 서로 손을 흔들고 헤어지던 모퉁이에서 그 날 보경은 곧장 집에 가지 않았다. 냉기가 온 몸을 훑었다. 부쩍 벌어진 일교차에 쓸쓸한 바람이 불어닥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보경은 목을 움츠리고 팔짱을 낀 채 현정의 뒤를 조심히 따랐다. 현정은 가방끈을 붙들고 고개를 내려깐 채 힘 없이 걸었다. 보경이 아는 현정 집 방향과 반대편으로 가고 있었다. 오래된 아파트 단지 정문이 나왔다. 엄마 있을 때, 저기 살았었어. 예전에. 현정이 했던 말을 보경이 떠올렸다. 정문 관리실 옆길을 지나 현정이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었다. 정문과 후문에서 가장 떨어진 건물로 향했다. 잘 아는 길인 것처럼 고개도 들지 않고 건물을 가로질러 모퉁이까지 걸어갔다. 측면에 지상과 맞닿은 계단이 있었다. 바깥쪽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는 통로였다. 현정은 계단을 올랐다. 계속해서 올랐다. 보경이 뒤를 따랐다. 땀이 흘렀고 나무의 정수리가 멀리까지 훤히 들어왔다. 발소리가 멈췄다. 잠시 조용해졌다. 금방 우우, 소리가 들렸다. 현정이 어느 순간 난간에 기대었다. 보경은 현정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현정은 한참을 흐느꼈다.



고등학생, 대학생이 되어서도 보경은 현정 같은 여자애들을 더러 마주했다. 소속이 다르고 동선이 겹치지 않아도 일부러 찾아갔다. 말을 걸고 친해졌다. 알아채고, 지켜보고, 관심을 보였다. 그 아이들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 정도면 기관이나 병원에서 실질적 도움을 받도록 유도할 수 있었다. 그 아이들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민혁에게는, 동생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민혁을 방치한 것. 백 할머니 이후로 자신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라고 보경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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