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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흔적 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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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멋대로 Oct 27. 2024

흔적 (6)

6.


민혁은 늘 집을 떠나고 싶어했다.


네 가족이 살던 아파트는 산자락에 있었다. 8층 복도 끝 모퉁이 호수였다. 문을 열면 길게 뻗은 창 너머로 나무가 우거진 산책로 입구가 내다보였다. 나무의 차림새가 계절의 어디쯤인지 일러주었다. 중앙 복도에 엘리베이터는 한 대였다. 여닫힐 때마다 스릉스릉 칼 가는 소리를 냈다. 미닫이 유리였던 건물 현관은 자동 개폐식으로 바뀐지 몇 년 안 되었다. 현관 맞은편 분리수거장 좌측 길을 따라 내려가면 디귿자 대열로 선 1동 2동 3동이 보였다. 회양목을 둘러놓은 도보 끝에는 2동과 3동 사이로 난 통로가 있는데 단지를 벗어나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버스 정류장은 거기서부터 좌로 우로 이어진 언덕을 꺾어 내려가 한참을 더 가야 나왔다. 정류장 가는 길에는 흙과 자갈이 많았다. 비가 오면 땅이 질어지고 웅덩이가 생겼다. 비 올 때마다 하얀 운동화 옆창에 묻은 진흙을 정류장 앞 연석에 비벼 털어내면서 민혁은 지긋지긋하다는 소리를 지긋지긋하게 했다. 버스는 십오 분에 한 대 꼴로 나타났다. 버스를 타고 여덟 정거장을 가야 도심이었다. 남매가 학교를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사오십 분은 됐다. 민혁은 잠이 많았고 머리가 길었다. 부쩍 외모에 신경을 쓰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누나의 컨디셔너를 몰래 썼고 아침마다 드라이질에 공을 들였다. 그러고 집을 나서면 열에 두세 번은 지각을 했다. 담임선생은 민혁을 자주 나무랐다. 한 번은 민혁이 선생에게 대들었다. 집이 먼 데 어떡해요 그럼. 저 딴 애들보다 한 시간은 일찍 일어나요. 제 잘못이냐고요. 보경 엄마는 며칠 뒤 학교를 찾았다. 담임과 면담을 했고 고개를 숙였다. 엄마는 민혁을 크게 나무라지 못했다. 민혁은 본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학교와 친구들로부터 한참 떨어져 있고 어린이 보호구역보다 노인보호구역이 더 눈에 띄던 동네를 벗어나고 싶어 했다. 민혁이 기숙사 딸린 고등학교를 꿈꿨던 이유였다. 이사 가자는 생떼만 삼 년을 쓰다 현실성 없는 소리인 줄 깨닫고 다른 꾀를 낸 것이었다. 비가 눈처럼 가볍고 눈은 비처럼 폭 젖은 겨울의 끝자락, 천으로 된 20인치 캐리어 하나를 들고 민혁은 집을 나섰다. 가족의 배웅은 사양했다. 버스 몇 번 타면 가는데 뭐. 이제부터는 등교시간 이십 분 전까지 푹 잘 거라면서 까불거렸다. 보경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동생의 천진한 모습이었다. 



1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고 민혁은 한 달이 지나서 집에 왔다. 기숙사에서 넷이 한 방을 쓰는데 재미있다고 했다. 김성준은 진짜 개또라이고 안민규는 말을 존나 웃기게 한다고 했다. 복싱하는 박찬휘는 오후마다 운동을 나가느라 아직 막 친하진 않다고 했다. 잠을 최대한 많이 잘 수 있는 것도 좋다고 그랬다. 즐거워 보였다. 여름이 지나고 보경은 점점 바빠졌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할 공부가 많았다. 민혁과는 어쩌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나 겨우 얼굴을 봤다. 한 달에 한 시간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대신 메시지로 안부를 가끔 주고받았다. 민혁은 언제나 잘 지낸다고 했다. 잘 먹고 잘 지내. 너나 잘 하셔. 나는 문제 없어. 보경은 그 말을 전부 믿었다. 동생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새끼들? 다 병신 새끼들이야. 언젠가 메시지로 민혁이 한 말을 남자애들 사이에서 흔히 하는 장난으로 흘려 들었다. 그토록 원했던 대로 이곳을 벗어나 있으니 불만이 없을 줄로만 알았다. 제대로 들여다 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못했다기보다 안 했다. 잘 지낸다니까. 내 동생이니까. 가족이니까. 난 볼 줄 아니까.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자신이 즉각 알아챌 것이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오만이었다. 민혁은 겨울방학 때 본가에 돌아와서는 온종일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고 보경은 학교와 독서실, 학원만을 오갔다. 돌이켜 보니 그랬다. 민혁은 그 겨울에 방에만 있었다.



저녁을 먹고 보경이 민혁을 찾았다. 엄마 생일을 열흘 앞둔 날이었다. 방문을 두드렸다. 야 뭐해. 반응이 없었다. 보경은 한참을 기다렸다. 나 들어간다, 하면서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방은 어두웠다. 푸르스름한 불빛에 민혁이 잠겨 있었다. 거치대 위 아가리를 넓게 벌린 노트북을 향해 목을 길게 빼고 의자에 쪼그려 앉았다. 민혁은 문간에 선 보경을 발견하고 귀를 덮은 헤드폰을 목으로 끌어내렸다. 노트북을 덮고 스탠드를 켰다. 투명한 피부가 차가운 파장을 반사시켰다. 분명 한 시간 전에 같이 저녁을 먹었지만 보경은 굉장히 오랜만에 동생을 본 것 같았다.


-뭐.


말투 때문은 아니었다. 둘은 비교적 사이가 좋았지만 여느 남매처럼 한 번씩 다투기도 했다. 그럴 때에는 가시 돋힌 말을 주고받았다. 너 뒤진다. 죽어. 미친 놈아. 까불지 마. 그런 말투 때문은 아니었다. 보경은 하려고 했던 말을 어느 틈새에 놓쳤다. 다시 건져올리기에 그곳은 너무 어두웠다. 보경은 아냐 아냐, 하고선 문을 도로 닫았다. 파고들어야 했다면 그때였을까. 그늘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만 생각했다. 뭔가 변화가 생기면 나는 바로 알 거야. 나는 바로 알 수 있을 거야. 보경은 그늘은 볼 수 있었다. 그늘 말고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


민혁은 2학년 1학기에 전학을 갔다. 새 학교에서는 두 달을 못 채우고 자퇴했다. 겨우 검정고시를 치렀고 다시 방에 틀어박혔다. 보경은 대학 근방에서 자취 생활을 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왔다. 민혁을 주의 깊게 지켜봤다. 그랬다고 생각했다. 가라앉은 남자아이는 가라앉은 여자아이와 전혀 달랐다. 쓰다듬을수록 빗장이 풀리는 여자아이들과 달리 어설프게 다가서면 더욱 벽을 높이 세웠다. 마냥 끌어안아서는 될 일이 아니었다. 민혁은 부모와 보경의 관심을 거부했다. 자신이 연약한 상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취급을 받는 데 모멸감을 느끼는 듯했다. 모든 게 괜찮다고만 했다. 내가 알아서 해. 내 감정은 내가 컨트롤 해. 그냥 지금은 이렇게 있고 싶을 뿐이야. 방법이 없었다. 어느 때는 공동空洞으로 이어지는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똑똑, 소리가 저 안에서는 쿵쿵, 쾅쾅 울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자신의 관심이 공격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해야 했다. 어거지를 쓸 수는 없었다. 입 다물고 틀어박힌 동생을 끌어낼 사람은 저 자신뿐이었다. 어느 아침에 민혁은 걸어잠근 방문을 열고 나왔다. 밥을 먹었고 엄마와 짧은 대화를 했다. 방에 들어갔고 이튿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보경이 주말에 집에 갔을 때 민혁은 거실에 나와 있었다. 왔어. 누나를 맞았다. 그리고 다시 들어갔고 다시 나왔다. 민혁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웃어 보였다. 보경은 그 때 처음으로 민혁에게서 또렷한 그늘을 보았다. 정류장 앞에서 흙 묻은 신발을 비벼 문대던 것처럼 되직한 그늘을 웃음에 문대어 지워내고 있었다.


보경이 특히 반대했지만 민혁은 두 번째 독립에 나섰다. 본가와 한참 떨어진 동네였다. 처음에는 고시원을 본다고 며칠 돌아다녔다. 그러다 부동산 바깥창에 써 붙은 매물에 홀려 버린 것이었다. 좁아터진 신축 고시텔보다 널찍한 반지하 구옥이 민혁 눈에는 매력적으로 보였다. 보증금이 조금 더 필요할 뿐 고시텔보다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엄마와 아빠를 설득해 냈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민혁은 순식간에 옮겨 갔다. 지상에서 지하로, 따뜻한 구속 대신 냉담한 자유가 있는 그곳에 아홉 달쯤 머물렀다. 겨우내 곰팡이가 필 줄은 저도 몰랐을 것이었다. 저도 살고 싶었을 것이었다. 민혁은 끝내 자신에게 해를 가했다. 일이 벌어지기 오 분 전에 보경과 통화를 했다. 미안해 누나. 꺾여버린 목소리를 듣자마자 보경은 같이 있던 친구의 전화기를 뺏어 119 신고전화를 했다. 동생이 죽어요. 동생이 죽어요. 빨리 가주세요. 아뇨, 저는 딴 데 있고, 거기, 거기가 어디나면, 저긴데, 여보세요? 너 듣고 있어? 너 끊지말고 있어. 잠깐만요. 야, 야, 아니, 저기 주소가, 잠깐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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