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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흔적 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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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멋대로 Oct 27. 2024

흔적 (7)

7.


......자 이 내용. 내가 이거는 할 말이 많지. 정신질환이란 게 눈에 보이는 또렷한 인과가 있을 거라고 믿는데요. 그런 게 없을 수 있어요. 있어도 안 보일 수 있어요. 그러니까 물리 법칙이나 수학 공식처럼 또렷하게 원인과 결과를 구분해서 펼쳐놓기가 힘들다는 거야. 흔히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다 뭐 이렇게 말을 하는데 정신질환에 대한 인식을 조금 더 친밀하게 만드려는 시도이긴 하지만은, 감기랑은 많이 다르죠 사실. 인식부터가 그렇잖아. 감기 걸렸다 하면 뭐라 그래요 다들. 어휴 그러냐. 편히 쉬어라. 따뜻한 거 먹고. 따뜻하게 입고. 끄죠. 많이 안좋은 것 같으면 병원에 가고. 감기 걸렸다는 사람한테 진심으로 왜? 니가 왜? 감기에 걸릴 이유가 니가 뭐가 있어? 따뜻한 밥 먹고 따뜻한 집에서 자는데? 이렇게 따져묻는 사람 봤어요? 아니면 말을 잃고 막, 불편해 하면서 숙연해지는 사람 봤어요? 감기 걸렸다고? 그런데 우울하다는 사람한테는 있다는 거지 이런 게.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가족들이. 친구들이 이래요. 야 그거 운동 부족이다. 맨날 쳐박혀서 아무것도 안 하니까 그러지. 해를 좀 봐라 야. 나도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면 있던 힘도 빠지더라. 좀 걸어. 나가서. 운동좀 해. 치킨이나 시켜먹지 말고오. 너를 보는 내가 우울하다. 채찍질 하기 바빠요. 내 병을 자기들이 검열해요. 그러면 어떻게 되냐. 우울을 고백한 사람은 그냥 머저리가 돼요. 자책을 하게 돼요. 아. 내가 부족해서구나. 내가 못나서 이렇게 된 거구나. 그게 아니더라도 아무도 신뢰하지 못하게 돼. 나는 정말 힘든데, 이런 말을 해 봤자 제대로 이해해 줄 사람은 없구나. 괜히 말했어. 나 혼자 감당해야지.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파고드는 거예요. 자기만의 굴로. 계속 계속. 그러다 어떻게 되냐.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기도 해요. 기댈 데가 없잖아. 당연하잖아요? 근데 씨발 그러다 안죽고 살면은 어휴 저 짐덩어리 소리 듣는 거고 죽으면 어휴 말을 하지 그랬어 이지랄 한다니까. 말하다보니까 열불 존나 나네. 자 보세요. 문제는 이거야. 실질적으로 뭐 이렇게 매정한 사람만 있겠냐고. 힘들다고 하면 진심으로 안아줄 부모나 친구도 많을 거예요. 근데 이건 개개인의 이야기고 우울증 정신질환에 대한 그 사회적 분위기란 게 있잖아. 한국은 그냥 저런 식이야. 저런 분위기로 흘러가. 이게 팩트야. 얘기 해 봤자 마이너스일 것이다 이렇게 자기검열하고 지레 겁 먹게 만드는 사회라는 거야. 그러니까 정상적으로 살다가 덜컥 정신이 불안정하게 되면 겁이 막 나는 거예요. 알리기가 힘드니까. 근데 정신질환은 특성상 적극적으로 알리고 도움을 받아야 호전이 쉽거든. 누가 몰라? 근데 말 못 해. 이해 못 받을까봐 무서워서. 아니면 사회적인 불이익을 받을까봐. 회사에서도 봐봐요. 내가 몸이 안 좋아. 상사한테 하루 쉬어야겠습니다 해. 왜. 감기 걸려서요. 문제 없는 대화죠? 근데 저 마음이 좀 안좋아서요. 정신과 진료 받으러 가야 할 것 같아요. 하는 순간 어떻게 되냐. 찍혀요. 문제 있는 인력으로. 인사고과 나락 가는 거야. 그래서 내가 병적으로 우울하다는 사실을 못 꺼내놓는 사람이 부지기수예요. 자기의 상태를 인정 안 하기도 하고. 특히 남자들. 군대에서 정신이 좀 불안정한 인원, 이걸 뭐라 그래? 관심병사. 관심병사가 뭐예요. 공인된 병신이라 이거예요. 저새끼 찐빠라 이거예요. 언제 수류탄 까고 총 연사 갈길 줄 모르니까 조심하라 이거야. 철저히 세뇌되고 학습됐지 한국 남자들은. 아 이거 티내는 순간 도태다. 낙오다. 병신 된다. 그치. 낙인 찍힌다. 쉽게 말해서 내가 아팠다 이거예요. 그래, 뭐 문지방에 새끼발가락 찧었어. 아프잖아. 막 피 나. 존나 아팠어. 그래서 아야! 아프다! 했어. 주변에 누구 뭐 엄마나 아빠, 고모 삼촌 친구들 보이는 사람 붙잡고 나 아파. 이거 아팠어. 얘기했다 이거야. 근데 그걸 본 사람이, 뭐가 아파? 엄살은. 운동을 안 하니까 아프지. 민첩성을 길렀어야지. 평소에 발가락을 단련했어야지. 니가 약해서 그렇지. 배가 불러서 아프지. 나 때에 비하면 그건 아픈 것도 아냐. 기합이 빠져서 그래. 애 낳고 길러 봐라 그게 아픈지. 이러는 거랑 똑같은 거야 환자 입장에서는. 조금 더 정확히 얘기하면은 사실은 문지방에 찧은 것도 아닌데 아픈 거야. 추정하는 거지. 지금 내가 아픈 게 삼 개월 전에 한 번 찧었어서 아픈건가? 역시 그렇겠지? 이러는 거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거죠. 근데 어쨌거나 그걸 다 주변에서 이악물고 나의 나약함으로 몰고 가려는 거고. 아니 씨바 아픈 게 죄야? 아픈 걸 아프다고 못 말할 분위기 속에 있으니까 다들 속병이 쳐 나고 곪아터지는거지. 자, 얘기가 이리저리 튀었죠. 정리합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사실 하나예요. 우울한 거 마음 안좋은 거 그거 니 잘못 아니에요. 니가 약해서가 아니에요. 너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그냥 사실이 그래. 근데 왜 그렇게 됐는지 혼자서 자책하고 뇌피셜 쓰진 마세요. 내가 뭐 때문에 우울하다고 단정짓는 사람들 많은데, 일단은 그건 추정이에요. 그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는데 알고 보면 미미할 수도 있다고. 반대로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여겼던 요소가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갉아먹고 있던 중일수도 있고. 원인 파헤치기는 멈추고 일단은 악화된 증상부터 호전시키는 게 먼저예요. 기침 나면 기침약 먹고 소화 안 되면 소화제 먹듯이. 그러니까 명확한 답을 내기 힘든 문제에 너무 혼자 매달려 있지 말고 따지지 마 일단은. 전문가를 찾아요. 내가 지금 뭔가 가라앉았다. 사는 게 맛없다. 이게 좀 오래 이런다. 한번씩 죽음을 곱씹고 그런다. 그럼 그냥 병원 가세요. 나아져요. 상담을 받아도 좋고. 뭐가 어떻고 저떻고, 뭐 때문에 그렇고 저혼자 따지려고 들지 말고. 일단 병원 가서 약도 몇 번 먹어보고, 조절도 해보고 해요. 그게 먼저예요. 병원 가 봤는데 별로던데요 안 좋던데요. 그럼 다른 데 가. 자기한테 맞는 의사가 있어요. 찾으세요. 찾을 수 있어요. 다리 부러져서 정형외과 아무데나 하나 찾아 갔는데 그 의사가 잘 안 봐주면 평생 다리 부러진 채로 살아야 돼요? 다른 데 찾아 가면 돼요. 괜찮아요. 그리고 뭐 내가 아프다는데 이상한 훈수 두는 말 듣지 마세요. 벌 쏘인 데 된장 바르라는 소리 듣지 말라는 거야. 그런 거 말고 주변에 한명이라도 응원해 주고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고마워 하세요. 그건 잘 된 거예요. 근데 그게 아니라고 해서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몰라서 그래요. 그냥 여기에 대해 아무 지식이 없는 거야. 그리고 꼭 병원 가세요. 도움 받을 수 있어요. 확실히 나아져요. 모든 걸 뿅 하고 해결해주지는 않지만. 흠. 여기까지 말씀드립니다. 흐음 흠. 아 흥분해서 말했더니 목 졸라 아프네. 자 다음 사연 갑니다......



보경은 스페이스바를 누르고 팔꿈치를 책상에 괴었다. 손바닥 아랫 부분으로 눈가를 지긋이 눌렀다. 거실로 나가 컵에 물을 따라 마셨다. 식탁 의자를 끌어다 앉으면서 검은 점이 찍히고 까맣게 물러 가기 시작한 바나나를 송이째 집어들었다. 하나 꺾어서 껍질을 벗겼다. 갈색으로 멍이 들어 흐느적거리는 알맹이를 덥썩 물어 기계적으로 천천히 씹었다. 민혁은 깡깡한 바나나를 좋아했다. 푸른 기가 살짝 도는 것도 잘 먹었다. 그 풀 맛 나는 탑탑한 걸 어떻게 먹냐고 물었을 때 누나는 그럼 왜 썩은 것처럼 못생겨져서 물크덩거리는 걸 좋다고 먹냐면서 반대로 따져물었다. 그야 보기에만 뭣 하지 맛은 좋으니까. 달콤하니까. 무른 바나나가 내는 달콤한 냄새. 껍질에서 나는 아릿한 냄새. 짓이긴 풀처럼 아릿한. 그런데 달콤한. 그런데 아릿한. 먼 곳을 보는 눈으로 보경은 달콤하고 아릿한 바나나를 씹었다.


민혁은 여럿을 두고 홀연히 떠나 버렸다.


민혁의 노트북도 남은 여럿 중 하나였다. 처음부터 뒤질 생각은 아니었지만 여러 홈페이지에 자동 로그인이 되어 있었다. 보경은 검색어와 유튜브 시청 기록을 따라갔다. 공무원. 연애. 결혼. 고졸. 초대졸. 사이버대. 곰팡이. 전세. 청년임대. 기초수급. 월세. 오피스텔. 군대. 신검. 정신질환4급. 우울. 우울증. 졸피뎀. 졸피뎀 술. 자나팜. 로라제팜. 불안. 불면. 죽음. 고독사. 안락사. 펜토바르비탈. 사후세계. 키워드의 흐름이 대강 보였다. 민혁이 본 것을 보경도 보았다. 봤다가 한참을 검색했다가 관련 정보를 찾았다가 다시 봤다. 기지개를 켜고 화장실에 갔다 물을 마시고 다시 앉았다. 자정이 다 되었다. 다른 영상을 클릭하려다 보경은 그만 노트북을 덮었다. 동생 것이라지만 지나치게 많은 걸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이제 힘이 달리기도 했다. 그로부터 일 년이었다. 처음 열어 본 노트북에는 너무 많은 흔적이 있었다.


그 일 년. 보경 가족은 서로서로 말을 아낀 일 년을 보냈다. 이차원으로 막연하게 그려 뒀던 인생 그래프에 삼차원의 거대한 말뚝이 박혔다. 아무 일도 없었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각자 하나씩 시작했다. 보경 아빠는 퇴직을 당겼다. 자기는 관심 하나 없다던 낚시를 나갔다. 산행을 했다. 텐트를 샀다. 보경 엄마는 앞장서 나서던 여러 모임에 발길을 끊었다. 절에 다녔다. 불공을 드렸다. 균형을 잃을 것 같으면서도 각자의 하루치 물음표에 답을 구해 냈고 새로운 관성을 만들었다. 거실에 둘러 모여 가끔씩 웃었다. 민혁이 또 한 번 먼 길을 떠나고 남은 셋은 그렇게 살았다. 보경의 노력으로 보경 엄마와 아빠는 어떻게든 지냈다. 보경은 대신 긴 시간 가라앉았다. 볼 수 있으면서 보지 않았던 것들. 봐야 했지만 보지 못했던 것들을 끊임없이 생각했다. 자신이 특별한 능력이라 생각한 것이 과연 진짜 능력인지. 오랜 착각이 아닌지. 민혁처럼 방에 틀어박혀 지난 기억을 훑었다. 백 할머니에게 돌아갔다가 현정에게 돌아갔다. 거스르고 거슬러 자신의 행동을 살폈다. 어느 날에는 전에 자신이 들여다보았던 친구들에게 새삼스럽게 연락을 돌렸다. 잘 지내고 있는지 안부를 물었다. 몇몇은 약속을 잡아 오랜만에 얼굴을 보기로 했다. 한 명씩 만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면서 근황을 나눴다. 스무 살을 기준으로 고작 몇 살 어렸을 뿐인 아이들이 성인이 된 지 한두 해가 지나서는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구겨진 마음이 거의 펴져 있었다. 지나간 이야기를 조심히 꺼내면 다들 멋쩍어했다. 그땐 왜 그랬을까. 그 땐 많이 어렸지 하면서 보경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네가 있어서 많이 힘이 됐어. 네가 있어서 잘 버텼어. 그 한 마디를 하고서는 금방 죽음과 동떨어진, 나이대에 어울리는 고민과 화젯거리를 늘어놓았다. 모두 그 시절의 자신에게서 졸업을 했다. 그런데 민혁은 왜 그런 시도를 했을까. 왜 나는 동생에게만큼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을까. 왜 민혁을 멈출 수 없었을까. 속 시원한 답을 얻지 못하여 보경은 집에 돌아와 다시 민혁의 노트북을 열었다.


그리고 제목 없는 메모장 파일을 여러 개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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