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스퍼 세탁기는 저마다 서로 다른 시간관념을 지니고 있다
모처럼 단잠을 자고 일어난 아침. 침대에 누워 편히 자본 게 도대체 얼마만인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좀 더 게으름을 부리고 싶었던 그 아침. 알 수 없는 기운에 이끌려 나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H는 아직도 곤히 자고 있었다.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를 벗어나서, 창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실수로 그만 커튼을 젖히고 말았다.
“아!”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간밤에 보았던 어슴푸레한 음영의 로키 산맥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대신 그 자리에 청명한 로키 산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로 한껏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오늘따라 유독 하얘 보이는 구름이 산맥을 앞 뒤에서 살포시 껴안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가 구름이고, 어디가 눈인지, 여기가 꿈인지, 여기가 현실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시간은 완전히 멈췄다. 나는 그대로 얼었다.
모든 게 영원할 것 같았던 그 순간.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던 그 순간. 호텔 앞의 캐나다 국기가 갑자기 펄럭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멈춰있던 시간은 천천히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나도 최면에서 깨어났다. 이 광경을 혼자만 소유한 게 아까워서, 이 경험을 혼자만 만끽한 게 아쉬워서, 자고 있는 H를 조용히 흔들어 깨웠다. 어젯밤 절대 깨우지 말라고 했던 H의 당부를 무시한 채.
“아!”
힘겹게 실눈을 뜬 H는 짜증 대신 짧은 감탄사부터 내뱉었다. 한동안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필요 없었다. 그냥 눈 앞의 광경을 공유했다. 그냥 이 순간을 함께했다. 충만했고, 충분했다.
재스퍼는 아담한 마을이었다. 우리처럼 느긋하게 걷는 사람들조차도 한두 시간 정도면 다 둘러볼 정도로 작은 곳이었다. 아담하고 작은 재스퍼가 우리는 금세 좋아졌다.
이렇게 작은 마을에 과연 세탁할만한 곳이 있기나 할까?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재스퍼에 단 하나밖에 없다는 코인 세탁소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세탁소가 어디 있는지 찾아보는 수고를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법했다. 무작정 시내를 어슬렁거리다 보면 더 빨리 세탁소를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아침을 먹자마자, 세탁소부터 찾은 건 입을 옷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깨끗한 옷이라곤 한 벌도 남아있지 않았다. 토론토에서부터 쌓이기 시작한 빨래는 기차에서 절정에 다다렀다. 혹시 기차 안에서 빨래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망상에 불과했다. 화장실에서는 양말 한 켤레 빠는 것도 눈치가 보일 정도였다.
재스퍼 사람들은 혹시 집에 세탁기가 없나? 코인 세탁소 규모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많아 봐야 세탁기 서너 대 정도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대충 세어 봐도, 세탁기가 40대 정도는 돼 보였다. 동네 사람들 모두 이 코인 세탁소에 와서 세탁하는 거 아냐?
규모보다 더 놀라웠던 건 분위기였다. 인공 향이 가득했도 이상할 것이 하나 없는 세탁소인데, 들어서자마자 은은한 커피 내음이 전신을 휘감았다. 세탁소 안 카페에서 음악과 함께 흘러나오는 향이었다.
후각보다 더 놀란 건 시각이었다. 벽에 걸려 있는 그림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벽에 장식용 그림이 한두 점 걸려 있을 수도 있지.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다가갔는데, 걸려있는 그림 모두 재스퍼 아티스트 길드에서 활동 중인 화가들의 그림이었다. 놀랍게도, 그림 아래 판매 가격도 적혀 있었다. 장식용, 감상용 그림이 아니라 판매용 그림이었다. 펜화는 $75, 새를 그린 그림은 $250, 나무를 그린 그림은 $375, 로키산맥을 그린 유화는 $395였다.
“꽤 매력적인 가격인데.” 금방이라도 그림을 살 사람처럼 나는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하나 사줄 거야?”
“저 정도쯤이야. 뭐. 그런데 마음에 쏙 드는 그림이 하나도 없네.”
“아이고, 됐네요. 그림은 됐고, 세탁비나 주세요.”
“세탁비가 얼마야?”
“대당 $6씩이니까, 전부 $12 필요해.”
“세탁 한 번 하는데 $12나 든다고? 빨래도 많지 않은데 왜 세탁기를 2대씩이나 돌려?”
“색깔 있는 옷은 이염될지도 몰라서 그래. 흰 빨래랑 색깔 있는 옷이랑 따로따로 빨아야 해. 그림도 사준다면서, $12에 왜 그렇게 벌벌 떨어?”
“그림 하고 세탁하고 어떻게 같아? 근데, 이 세탁기 건조까지 한 번에 다 되는 거지?”
“아니, 건조기는 따로 돌려야 하는 것 같아. $0.25에 4분. 세제도 따로 사야 되는 것 같고. 세제는 개당 $1.5네.”
세탁과 건조까지 마치려면 못해도 $15는 필요할 듯싶었다. 아무래도 그림은 다음을 기약해야 할 듯싶었다.
세탁 시간은 20분. 무슨 영감이 떠올랐는지 H가 갑자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벽에 걸린 그림들 때문인지, 모처럼 창작 욕구가 솟아났나 보다. 그녀가 그림 그리는 것을 지켜본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었다.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던 백인 여성이 H의 그림을 보더니 말을 걸어왔다.
“아 유 아티스트?”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건 H뿐만이 아니었다. 자기는 예술가가 아니라는 H의 황급한 부정에도 불구하고, 백인 여성은 호기심을 감추지 않았다.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속사포로 내뱉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쉴 틈 없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그녀의 말을 우리는 대부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막연히 짐작건대, H의 그림에 대해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는 듯싶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녀의 말이 어서 끝나기를 기다릴 뿐.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이 순간에 최고의 대답은 미소뿐. 상대방이 우리의 웃음의 의미를 알아채기를 바랄 뿐. 더 이상의 대화가 제발 그쯤에서 그냥 마무리되기를 바랄 뿐.
먼저 침묵을 깬 건, 백인 여성이 아니었다. 그새를 못 참고 H는 결국 비밀을 털어놓았다. 양심선언을 해버렸다.
“쏴리, 아이 돈 스피킹 잉글리시 웰.” "오! 노 프라블럼. 노 프라블럼." 알아들은 척하는 것보다, 차라리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 아마도 그런 마음가짐이었을 것이다.
놀랍게도 대화는 단절되지 않았다. 백인 여성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정확하고 짧은 영어로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서로의 국적을 확인했고, 여행 중이라는 것도 밝히고, 그림에 대해 칭찬이 오고 갔다. 모두들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은 눈치였지만, 거기까지가 최선이었다. 갑자기,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때맞춰, 세탁소 안에는 '프리티 우먼'이 경쾌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신기한 일이다. 두 대의 세탁기를 동시에 돌렸는데, 세탁기 한 대만 먼저 세탁이 끝났다. 다른 세탁기는 자그마치 2분이나 더 지나고 나서야 세탁을 끝마쳤다. 첫 번째 세탁기가 일을 덜 한 것인지, 두 번째 세탁기가 일을 더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확실한 한 가지는, 여기 있는 세탁기는 저마다 서로 다른 시간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궁금해졌다. 세탁소 안, 모든 세탁기의 시간 개념을 테스트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시간과 예산이 들 것 같아서 그냥 미스터리 한 사건으로 남겨놓기로 했다. 대신, 이 놀라운 발견을 H에게만 은밀하게 말해 주었다. "그럴 리가? 자기가 두 번째 세탁기를 늦게 돌렸겠지." H는 믿지 않았다. 나를 의심했다. 틀림없이 내가 두 번째 세탁기를 늦게 돌린 것이라고 확신했다.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보니, 두 세탁기의 시동 버튼을 누른 건 정작 내가 아니라 H였다.
다 마른 세탁물에서는 더 이상 사람의 체취가 느껴지지 않았다. 손톱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