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 없는 재스퍼 산책
한껏 여유를 부리면서, 재스퍼 역을 향해 걷고 있을 때였다. H가 내 왼팔을 꽉 움켜쥐고,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곰! 곰! 저기 곰!" 놀란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멈췄다. 나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재빠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H의 손을 황급히 뿌리친 채로 말이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나도 알 수 없었다. 그냥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을 뿐, 어떤 판단이나 의도를 가지고서 한 행위가 아니었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무렵에, 나와 H와의 거리는 이미 대여섯 걸음 벌어져 있었다. 모든 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내가 뒷걸음친 게 아니라 혹시 H가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이동한 건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떨어진 채로, H가 가리키고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H의 손끝은 어둑어둑한 숲을 향해 있었다. 대략 삼십 걸음 정도 떨어져 있던 그 어둠 속에 정말로 동물 한 마리가 있었다. 나보다 배 이상은 커 보이는 형체가 네 발로 서 있었다. 온몸이 검은색 털로 뒤덮여 있었다. 번쩍거리는 눈빛으로 우리를 먹음직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곰인가? 곰이 이렇게 도시를 배회한다고?
어둠 속을 천천히 들여다보니, 동물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 서 있었다. 사람이었다. 동물과 사람은 연결되어 있었다. 그건 분명 목줄이었다.
“혼자만 살겠다 이거지?” 한참을 웃고 난 뒤에야, H는 내게 면박을 줬다. “여기 주민들은 왜 곰 같은 개를 데리고 산책을 다니는 거야?” 대답 대신 변명을 늘어놨지만, 이미 늦었다. 남자로서, 남편으로써 지켜야 할 최소한의 품위는 벌써 잃은 지 오래다. 아마 한 동안은, 회복할 기회조차 없을 것이다. 남자가 되어 가지고, 그 순간에 뒷걸음질을 치다니. 아! 쪽팔려.
“괜찮아!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뭐.”
H가 내 어깨를 토닥이면서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지만, 구겨진 마음은 여전히 착잡했다. 이상하게도, 그녀가 위로하면 할수록 점점 더 괴로워진다. 차라리 그 개가 진짜 곰이었다면. 그랬다면 그나마 좀 나았을까.
그 순간, 곰 같은 개가 우리를 앞질러 걷기 시작했다. 가까이서 보니, 더 곰 같아 보인다. 내 비참한 기분을 전혀 알 리가 없는 녀석은 발걸음이 구름처럼 가볍다. 녀석은 커다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유유히 내 눈 앞에서 사라졌다.
그날 밤, 꿈속에서 쥐구멍을 들락거리는 꿈을 꾸었다. 도대체 몇 번을 왔다 갔다 했는지 모른다. 그보다 더 슬펐던 건, 쥐구멍이 너무 작아서 내 큰 몸이 계속 끼었다는 것이다. 꿈속에서 마저 창피함을 숨길 수 없었나 보다. 밤새도록 쥐구멍에 나를 꼬깃꼬깃 밀어 넣다가 잠을 설치고 말았다.
악몽 같던 어제 일을 빠르게 잊고 싶었나 보다. H에게 오늘은 재스퍼를 벗어나자고 했다. 하루 종일 나를 놀려댔던 H도 웬일인지 선뜻 동의했다.
아름다운 레이크 호수에 다녀오고 싶었지만, 걸어가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다. 호수까지는 차로 왕복 6시간. 차를 빌리지 않고는 갈 수가 없었다.
빠른 단념과 동시에, H에게 그냥 산책이나 다녀오자고 했다. 대신 재스퍼 마을 구경은 대충 했으니, 오늘은 좀 멀리까지 걷자고 했다.
마을은 북쪽으로 난 길과 남쪽으로 난 길이 있었다. 어제 곰 같은 개를 만난 게 남쪽이었으니, 오늘은 북쪽으로 걸을 팔자였다.
록키 산맥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걷다 보니, 갑자기 도로가 등장했다. 왕복 4차선의 아스팔트 도로다. 도로 건너편에는 낡은 기차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기차들의 무덤이었다. 달리는 걸 잊어버린 기차들의 몸에는 그라피티가 가득했다. 이 기찻길로 스무 시간 정도 달리면, 아마도 밴쿠버에 다다르겠지. 밴쿠버는 우리의 종착역이었다.
대로를 피해 숲길로 걸었다. 얼음이 녹지 않은 길 위에는 똥이 가득했다. 얼음길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치다 보니, 자연스럽게 똥을 밟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차차, 흙을 밟는 건지 똥을 밟는 건지조차 분간되지 않았다. 잘 먹고 잘 싼 똥은 흙과 다를 바 없었다.
똥과 얼음이 가득한 길을 지나고 나니, 얼음이 가득한 강물이 앞을 가로막는다. 애써베스카 강이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강물을 마주하고 섰는데, 신기하게도 마음은 점점 뜨거워졌다. 흐르고 있다는 건 살아있다는 것. 적막을 깨는 물소리 속에서, 내가 흐르는 건지 강물이 흐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제는 곰 안 무서워?”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H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곰이 뭐가 무서워. 이런 추운 겨울에는 다 잘 텐데. 어제는 그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뒷걸음질을 쳤어.” 혹시 어제 있었던 사건을 또 추궁할까 싶어서, 일부러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곰이 겨울잠 계속 자는 거 아니야. 겨울잠 자다가도 배가 고프거나 하면 일어나서 돌아다니기도 해.” 갑자기 H가 상식 밖의 소리를 했다. “응?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해. 겨울잠 자는 곰이 어떻게 돌아다녀?”
“내가 예전에 다큐멘터리에서 본 적이 있거든. 여기 캐나다에도 그리즐리가 사는 걸로 알고 있는데. 어쩌면 지금쯤이면 돌아다닐지 몰라.” “설마? 아직 이렇게 추운데?”
대화가 오고 간지, 채 100m도 안 걸었을 무렵. 나는 얼음처럼 멈춰 서고 말았다. 눈 위에 찍힌 커다란 발자국 때문이었다.
“이거, 이거. 곰 발자국 같지 않아? 눈 위에 찍힌 이 발자국 말이야.”
“그러네. 진짜 곰 발자국 같아 보이네. 이 발자국 자기 발 보다 훨씬 큰 거 같은데?”
“잠깐만. 잠깐만. 가만있어 봐. 눈 위에 이 발자국이 있다는 건. 지금 정말로 곰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거 아냐?”
“그렇지. 그렇지.”
그 순간, 어제 재스퍼 마을을 걷다가 상점에서 우연히 보았던 문구가 하나 떠 올랐다.
Bear Spray Sold Here.
한겨울에 뭐 이딴 걸 다 팔아? 그 문구를 보면서, 나는 그렇게 코웃음을 쳤었다.
곰 발자국을 발견하고 난 뒤, 우리는 산책이라는 것을 빠르게 망각하기 시작했다. 이제껏 걸었던 그 어떤 걸음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마을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걷다가, 뛰다가, 뛰다시피 걷다가, 전력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고해성사도 빠뜨리지 않았다. 곰 스프레이를 안 사 온 것을 후회했고, 그동안 곰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뒷걸음질 치지 않고,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