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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이란 거 참 무섭다 그렇지?

생수 한 병이 주는 깨달음

by muum

무알코올 맥주도 제 딴에는 술이라고, 한잔 했더니 갈증이 났다. 갈증은 계속 나는데, 호텔 객실 안 어디에도 생수가 보이지 않는다. 냉장고 안에 당연히 있어야 할 생수가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한 병은 들어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호텔 객실 안을 샅샅이 뒤졌는데도 끝내 생수는 발견되지 않았다.


아! 객실 밖 복도에 있나 보다. 공용으로 사용하는 식수대가 복도에 놓여 있는 호텔도 있으니까. 객실을 나서서 복도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복도 어디에도 식수대 비슷한 것조차 보이지 않는다. 슬슬 짜증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미숙한 호텔 서비스를 탓하기 시작한다. 빠뜨릴 게 따로 있지. 생수를 빠뜨리다니. 객실에 들어가서 전화를 할까 하다가, 이왕 나온 김에 1층 로비로 가서 당장 따져보기로 했다.


실례합니다. 생수는 어디 있나요? 막상 이렇게 묻기는 했지만, 내 질문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 도대체 생수는 어디 있나요? 어떻게 생수 서비스를 빠뜨릴 수 있죠? 사실은 이런 의미였다.


내 영어 발음이 이상했는지, 직원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린다.

로비 뒤쪽을 돌아서 가면 생수가 있습니다. 호텔 직원의 말과 행동으로 미루어 추측하건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왜 생수를 그런 곳에 숨겨두는 거야?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 안 하네. 혼잣말로 투덜대며, 로비 뒤쪽을 향해 걸었다.


코너를 돌자마자 바로 눈에 보인 건, 거대한 자판기였다. 그 안에는 그토록 마시고 싶었던 생수병이 가득 들어 있었다. 생소한 브랜드의 500mL 플라스틱 생수병이었다.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뿐. 500mL 생수병의 가격이 자그마치 $2.25였다. 이거 좀 너무한 거 아냐?


다시 로비 직원에게 따지러 다가갔다.

생수는 저거밖에 없나요? 막상 이렇게 물었지만, 내가 물은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 이거 너무 돈만 밝히는 것 아닌가요? 조그만 생수병 하나를 $2.25씩이나 받는 건 너무 하잖아요. 이런 의미였다.


네. 한 대밖에 없습니다. 생수는 어쩌고 저쩌고. 직원이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는데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언뜻 들으니, 사과하는 것 같기도 했다.


여기 물가가 비싸다는 소문을 미리 듣기는 했지만 이건 좀 심한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자판기 앞으로 갔다. $3을 넣고 생수 버튼을 눌렀다. 500mL 생수 한 병과 잔돈을 챙겼다. 1병을 더 살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아냐! 한 병이면 되지. 마트에 가서 사야지. 제일 큰 걸로.


비싼 생수 한 병을 들고, H가 있는 객실로 되돌아왔다. 샤워를 막 마치고 나온 그녀에게, 비싼 생수라고 아껴 먹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2.25라는 구체적인 가격을 제시하니, H도 꽤 놀라는 눈치다. 물가 진짜 비싸다는 H의 불만에, 마트가 문만 열었어도 절대 사지 않았을 거라는 나의 안타까움이 더해지고, 마트에서는 싸게 팔 것이라는 H의 예상, 마트 문 열자마자 제일 큰 생수를 사겠다는 나의 장담까지 더해지니 더할 나위 없었다.


분풀이는 한동안 끊이지 않았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갈증은 점점 심해졌다. 생명수 같은 500ml 생수 한 병을 둘이서 홀짝홀짝 아끼면서 나누어 마셨다. 이상하게도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 나는 밤이었다.


다음 날 아침. H보다 먼저 일어나 로키 산맥을 마주하면서, 한껏 재스퍼의 아침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렇게 깨끗하고 맑은 공기는 처음 마셔 보는 것 같았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정말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H가 눈을 뜨자마자, 나는 물부터 한 컵 건네주었다. 그녀는 벌써 마트에 다녀왔냐면서, 부지런해진 당신 덕분에 아침부터 호강한다고 흐뭇해했다. 그녀가 물을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그 물이 어떤 물인지 비밀을 털어놓았다. 당신이 마신 그 물은 객실 안 화장실 수도꼭지 틀고 받은 물이야. 살짝 놀란 표정의 H에게 창밖의 로키 산맥을 보라고 가리켰다.


당신이 마신 물은 바로 저기에서 온 물이야.

컵과 로키 산맥을 번갈아 바라보던 H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어젯밤 로비에 있던 직원이 나에게 무엇을 애타게 설명하려고 했는지 그제야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H가 물 한 컵을 더 마시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조용히 읊조렸다.


습관이란 거 참 무섭다.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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