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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전하지 못한 인사가 있다

by muum
텐트 치는 게 그렇게 어려울 줄 몰랐어.
둘이서 끙끙대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에선가 구세주가 나타났어.
정말 귀신같은 솜씨였지.





하와이 여행을 시작한 지 한 달이 다 되었을 때다. 슬슬 모든 것이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여행의 반전이 필요한 때였다. 뭐가 좋을까 고민하던 중에, 우연히 하와이에서 캠핑했던 블로그를 읽게 되었다. 보는 순간, 바로 이거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나는 그녀에게 캠핑 가자고 졸라 대는 철부지 아이로 변신해 있었다.


캠핑 이야기를 처음 꺼냈을 때,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반응은 ‘무조건 싫다’가 아니었다. 그녀는 ‘캠핑이 무섭다’고 했다. 캠핑이 왜 무서워? 캠핑은 재미있는 거야. 난 캠핑이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캠핑의 좋은 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 자신에게까지 거짓말을 하고 있던 셈이었다. 그녀가 캠핑에 같이 가자고 승낙할 때까지 나는 설득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가 살면서 언제 다시 하와이에서 캠핑해 보겠어? 내 소원이야. 딱 한 번만 같이 캠핑 가자.” 결국, 그녀는 조건부 승낙을 하고 만다.

“그럼 딱 2박 3일 만이다.”


하와이에 있는 캠핑장을 검색해 보기 시작했다. 가장 멋진 캠핑을 하고 싶었다. 카일루아 비치 인근에 있는 캠핑장이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가장 인기도 많았다. 그런데 이번 주 예약은 꽉 차 있었고, 다음 주 예약은 할 수 없었다. 다음 주에는 우리가 하와이에 없을 테니까. 재빨리 단념하고, 다른 캠핑장을 찾아보았다. 와이마날로 비치 캠핑장은 다행히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런데, 예약하려면 차가 있어야 했다. 차량 넘버, 연식, 색깔, 라이선스를 입력해야 예약할 수 있었다. 캠핑을 예약하는 것과 차량 소유와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우리는 차가 없는데, 어떻게 예약하지?”

그녀가 하와이에 사는 Y에게 연락했다. Y가 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Y의 차량 정보와 라이선스로 간신히 예약을 마쳤다.

“그런데, 캠핑 도구는 어떻게 해? 캠핑 도구가 있어야 캠핑을 할 수 있잖아?”

“아! 그 생각은 미처 못했네.”

그녀가 살짝 눈을 흘긴다. 하와이에 사는 Y에게 또 연락했다. Y는 우리가 하와이에서 캠핑할 거라는 걸 미리 예견이라고 하고 있었던 걸까? 살뜰하게도 캠핑 도구 일체를 가지고 있었다. 텐트, 코펠, 버너, 침낭, 간이 테이블, 접이식 의자 등 캠핑 도구 대부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캠핑장에 캠핑 도구를 어떻게 가지고 갈 거야?”

“아! 그 생각도 미처 못했네. 그냥 버스 타고 가면 되지 않을까?”

그녀는 내게 대답을 하는 것도 지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Y에게 또다시 연락을 했다. Y는 자기가 차로 다 실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캠핑장을 예약하는 것과 차량 소유. 둘 사이의 연관성을 그제야 비로소 이해했다.

“먹을 거만 준비하면 된대.”

2박 3일 예정이었지만, 넉넉하게 4일 치 식량을 준비했다.


밸런타인데이 하루 전날. 미리 약속한 대로, Y는 캠핑 도구를 몽땅 싣고서 우리를 캠핑장까지 데려다주었다. 와이마날로 비치가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는데도 무척 낯설어 보였다. 버스를 타고 한 번 무심히 지나치기도 했었고, Y가 드라이브하면서 한 번 소개까지 해주었는데도 말이다. 왜 그럴까? 이전에 보았던 와이마날로 비치와 다르게 오늘따라 바다가 차분해 보였다. 은은한 에메랄드빛이 마음을 설레게 하곤 했는데, 오늘은 깊고 그윽한 푸른색이다. 하늘의 절반 이상을 가득 메운 흰 구름 탓이라고. 애꿎은 구름만 탓해 본다.


“그런데 텐트는 쳐 보셨어요?” 텐트의 주인인 Y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내게 묻는다.

“마지막으로 텐트 쳐 본 게, 아마도 삼십 년도 더 된 것 같은데? 보이 스카우트 때 쳐 본 게 마지막이었거든.”

보이 스카우트라는 단어에 Y는 살짝 당황하는 눈치다.

“그래도, 둘이서 치면 그나마 좀 낫겠죠?”

“남자 둘이서 이깟 텐트 하나 못 치겠어?”

금방 완성될 것 같던 텐트는 자리 잡을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텐트의 주인도, 한때는 멋진 보이 스카우트였던 나도 점점 자신감을 잃어간다.

“설명서 같은 거 없어? 텐트 치는 법 적혀 있는 거”

자존심을 살짝 굽히고, 나는 급기야 텐트 설명서를 찾기 시작했다.


멀쩡하게 생긴, 건장한 두 남자가 텐트를 치는 모습이 그렇게도 엉성해 보였던 걸까? 갑자기 어디선가 등장한 하와이안 아주머니 한 분이 불쑥 우리를 거들기 시작했다. 남루한 옷에, 초췌한 얼굴을 지닌 아주머니였다. 겉모습만 얼핏 봐서는 남에게 전혀 도움을 줄 만한 행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차림새였다. 그나저나 도대체 누구신데 남자들 일에 함부로 끼어드시는 거예요. 저희도 충분히 텐트 칠 수 있단 말이에요. 굳이 안 도와주셔도 돼요.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든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눈앞에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었다. 이 아줌마 텐트 치시는 솜씨가 정말 귀신같았다. 어! 어! 하는 순간에 이미 텐트는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혹시 텐트 제조사에서 홍보차 나오신 분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즈음 텐트는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 그 때야 눈치챌 수 있었다. 아! 이 아주머니는 여기 캠핑장을 관리하시는 분이구나. 그러지 않고선 이렇게 텐트를 잘 칠 수가 없다. 우리를 선뜻 도와줄 이유가 없다. 스스로 그런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텐트가 완성되자마자, 아주머니가 갑자기 사라지셨다. 아주 쿨하게. 한마디 말도 없이 사라지셨다. 제대로 인사도 못 했는데. 갑자기 어디로 가신 거야? 아무리 그래도 고맙다는 말은 해야 할 것 같아서, 아주머니를 찾기 시작했다. 아주머니의 정체가 궁금하기도 했다. 캠핑장 구석구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때야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텐트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구덩이가 가까이에 있다는 것도 알았다. 움푹 팬 그곳에는 빛바랜 낡은 텐트, 여기저기 걸려있는 찢어진 옷가지들, 그리고 누추한 행색의 사람들이 있었다. 캠핑 온 사람들이 아니었다. 노숙인들이었다. 아주머니도 그곳에 앉아 계셨다. 주변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있는 그분의 정체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아주머니는 텐트 제조사에서 계셨던 분도 아니었고, 캠핑장 관리인도 아니었다. 왜 그렇게 텐트를 잘 쳤는지, 소리도 없이 우리 곁을 왜 황급히 떠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그 구덩이 속으로 선뜻 걸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주머니가 바로 눈앞에 앉아 있었는데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냥 멀찍이 떨어진 채로 가만히 서서 아줌마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 황급히 뒤돌아섰다. 아주머니가 먼저 나를 발견하기 전에 내 텐트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갈 때 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왔다. 텐트 안에 무사히 숨고 나서야,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이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하지만 다시 나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고마워요. 아줌마! 텐트 치는 거 도와주셔서. 입안에서만 맴돌던 감사 인사를 계속 속으로만 곱씹고 있었다.


캠핑장에서 그 아주머니를 다시 마주할 기회는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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