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uum Nov 17. 2019

불청객 02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소리의 주인공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잔상이 남아 있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좀 전에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서 처음부터 다시 재현되고 있었다. 처음 바퀴벌레를 마주한 순간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무한 반복되고 있었다. 심장은 제멋대로 날뛰고, 후끈 달아오른 얼굴은 식지 않았다. 마음이 한번 흥분되기 시작하자, 좀체 진정되지 않았다.


“당신이 없었다면, 난 못 살았을 거야.” 아내가 나의 공을 치하해줬다. “혼자 있었으면 바퀴벌레를 본 순간 죽어버렸을지도 몰라.” 눈앞에서 바퀴벌레를 없애준 내게 아내는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하지만 아내의 공치사도 마음을 다시 평온하게 만들어 주지는 못했다. 다시 잠드는 데 도움이 되진 않았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가만히 있던 바퀴벌레가 제자리에서 몸을 뱅글뱅글 돌렸어. 갑자기 내 쪽으로 말이야. 그러더니 더듬이를 쭈뼛 세우는 거야. 더듬이로 나를 가리키더니, 살살 흔드는 거 있지?” 나는 아내에게 좀 전에 있었던 무용담을 한껏 과장해가며 털어놓았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나름대로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신기하게도, 말을 하면 할수록 마음이 조금씩 편안해졌다. 오늘 밤 잠들기는 다 틀렸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슬금슬금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까무룩 잠이 들었던 걸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되지 않은 몽롱함이 기분 좋게 덮쳐오는 순간. 아내가 다급하고 은밀하게 나를 또 흔들어 깨웠다. 


“저 소리 들려?” 아내가 좀 전에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하고 있었다. ‘내가 혹시 영원히 순환되는 꿈속에 있는 건가?’ 기시감에 빠진 건지, 미시감에 빠진 건지, 알 수 없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소리가 들리는지 집중했다. 아내의 말마따나 또 소리가 들렸다. 좀 전의 소리와 같았다. 소리는 아까보다 더 명확했고, 가까이서 들렸다. 순간, 내가 혹시 아까 바퀴벌레를 확실히 죽이지 못했나 의심이 들었다. 죽었던 바퀴벌레가 다시 살아나서 움직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번거로웠지만, 또 확인해야만 했다. 좀 전과 다르게, 이번에는 민첩하게 불을 켰다. 금세 눈이 적응했는지 다행히도 이번에는 눈이 부시지 않았다. 방안이 한눈에 들어왔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벽은 여전히 하얬고, 타일 바닥은 변함없이 번쩍거렸다. 그 어디에도 미세한 움직임 같은 건 눈에 띄지 않았다. 소리도 더 들리지 않았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숨어 있다. 바퀴벌레가 숨어 있다. 나라면 침대 아래 숨었을 것이다. 확신이 들었다. 침대 아래는 어둠이 지배하고 있었다. 형광등 불빛이 그 아래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침대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어둠 속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았다. 심연같이 깊은 어둠 속, 다른 어둠이 있었다. 번쩍거리는 어둠이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움찔하는 어둠이 있었다. 


“바퀴벌레 맞아? 또 있어? 몇 마리야?” 침대 위에서 꼼작하지 않고 내내 나를 지켜보기만 하던 아내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내게 물었다. 나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아내에게 침대에서 당장 비켜 달라고 부탁했다. 


생각보다 침대는 무거웠다. 건장한 성인 남자가 혼자들 수 없을 정도였다. 일단 무거운 매트리스를 침대에서 먼저 치우고, 나머지 가구를 천천히 세우기 시작했다. 서서히 어둠이 걷히고 있었다. 누워있던 침대를 세로로 세우고 나니, 모든 게 선명해졌다. 어둠은 어둠 속에 숨을 수 없었다. 좀 전에 보았던 검은 점보다 더 큰 검은색 점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빗자루를 다시 찾아들고서, 또 내리쳤다. 이전보다 더 세게. 더 빠르게. 신기하게도, 이번에는 전혀 떨리지 않았다. 분명히 명중했다고 생각했는데, 멋쩍게도 빗나갔다. 놀란 어둠이 갑자기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도망치는 속도가 상상 이상으로 느렸다. 도망을 치는 건지, 산책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천천히 움직이는 녀석을, 천천히 겨냥하고, 이번에는 정확하게 빗자루를 내리쳤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었다.


소리는 더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자면서 악몽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도망가고 있었다. 사방이 온통 하얀 공간을 끝도 없이 달리고 있었다. 힘들어서 어둠 속에 숨어도 소용없었다. 금세 밝은 빛이 나를 찾아내서 비추었다. 다행히도, 나 혼자서 달리고 있는 게 아니었다. 내 뒤에서 아내가 나를 부지런히 뒤쫓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아내의 모습이 이상했다.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바퀴벌레의 모습이었다. 가만 보니, 나도 아내와 같은 모습이었다.



이전 07화 불청객 0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