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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um Nov 17. 2019

불청객 01

치앙마이 여행 8일째 되는 날. 숙소를 옮겼다. 새 숙소는 넓고 깨끗했다. 벽과 천장은 흰색이었고, 바닥은 차가운 백색이었다. 눕고 싶을 정도로 서늘한 바닥이었다. 바닥에 깔린 타일들이 백색 형광등 불빛을 끊임없이 반사해서 낡은 타일도 새 타일 같아 보였다. 완벽에 가까운 백색의 조화를 깨뜨리고 있는 건 드문드문 놓인 가구들뿐이었다. 구석에 놓인 베이지색 침대와 아이보리 매트리스, 그 위에 깔린 커피색 침대 시트가 옥에 티라면 티였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막 잠이 들려는 순간. 낯선 소리가 들렸다. 틱! 틱! 두 가지 물체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였다. 분명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방 안이 고요해서 그런지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소리는 불규칙한 리듬을 갖고 있었다.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기도 했고, 빨라졌다가, 느려지기도 했다. 어느 순간에는 갑자기 뚝 멈추기도 했다. 그러기를 몇 차례. 거슬렸지만, 잠결에 내가 잘못 들은 거라고 여겼다. 차라리 꿈이길 바랬다.


“저 소리 들려?” 먼저 잠든 줄로만 알았던 아내가 속삭였다. 아내가 묻는 순간, 소리는 비로소 현실이 되었다. 소리는 분명히 실존하고 있었다. 혼자만의 착각이라고 우기는 것은 무의미했다. 뭔가 조처를 해야만 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무엇보다 소리의 정체가 궁금했다. 도대체 뭐가 저런 소리를 내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정체를 알려면, 일단은 불부터 켜야만 했다. 전등 스위치까지는 대략 열 걸음 정도. 살금살금 걷는다. 조심스럽지만 신속하게 스위치 있는 곳까지 이동했다. 불을 켜자, 일순간 방 안이 환해졌다. 모든 게 한눈에 들어왔다. 벽은 더 하얬고, 바닥은 더 차가워 보였다. 눈이 부셔서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간신히 눈을 다시 뜬 순간,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소리의 정체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차가운 백색 바닥에 검은 점이 하나 찍혀 있었다. 타원형의 커다란 점이었다.


보고 있는데도, 차마 믿을 수 없었다. 잘못 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혹시 지금 내가 꿈속에 있는 게 아닐까? 

방 안의 모든 것이 그대로 멈춘 그 순간. 침대에 있던 아내가 그것을 보지 못했다면, 나 또한 못 본 척했을지도 모른다. 놀란 아내가 벌떡 일어서지만 않았어도, 조용히 다시 불을 껐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침대로 되돌아가서, 아내 곁에 조용히 누웠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냐. 걱정하지 말고 그냥 자!” 아내를 다독이면서, 안심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아내도, 나도, 안다. 소리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더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아내는 너무 놀라서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비명을 지르고 싶지만, 튀어나오는 소리를 간신히 틀어막고 있었다. 아내는 자기 손으로 자기 입을 막은 채, 침대 위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잠시 후, 가냘픈 입에서 애달픈 신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갑자기 방언이 터진 사람처럼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으으으! 아아아!”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닌 채로 절규하기 시작했다. 


나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당황스럽긴 나도 매한가지였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눈앞의 그것을 묵묵히 관찰하는 것뿐이었다. 이렇게 바라보고만 있어도 그것이 눈앞에서 사라진다면, 밤새도록 지켜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눈에서 레이저가 뿜어져 나갈 정도로 쳐다보는데도, 눈앞의 그것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자신의 정체가 낱낱이 드러났는데도, 그것은 당황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가만 보니, 한 치도 물러설 기세가 아니다. 나보다 더 침착하고, 더 당당하다.


기세 싸움에서 일단 밀린 나는 갑자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뭐라도 해야만 했다. 비겁하게도 나는, 허둥지둥 무기를 찾기 시작했다. 몸은 상대방보다 몇백 배 더 컸지만, 당당하게 맨손으로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무기를 찾는 순간까지, 상대방이 어서 도망가기를 바랐다. 내가 찾지 못하는 곳으로 꼭꼭 숨어버리길 바랐다.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것은 꼼작도 하지 않았다. 내가 빗자루를 찾아서 한 손에 들고,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순간까지도. 있는 힘껏 빗자루를 내려치는 순간까지도. 


방심했던 걸까? 너무 자신만만했던 걸까? 이제 와서 도망가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걸까? 아마도 그런 이유는 아닐 것이다. 녀석은 아무것도 몰랐던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조차도 몰랐던 것 같았다. 눈앞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몰랐던 것 같았다. 그날 밤 이전까지 자신이 마음껏 돌아다녔던 방이었다. 공간의 주인은 자신이었다. 불청객은 오히려 우리 두 사람이었다. 


죽기 직전까지, 녀석은 더듬이를 살살 흔들고 있었다. 어쩌면, 반가운 마음에 우리에게 막 인사를 건네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살며시 빗자루를 들었다. 예상대로 빗자루 아래에는 소리의 주인공이 있었다. 점은 처음 보았을 때 보다 조금 더 납작해졌다. 살짝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다. 눈앞에는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크기의 바퀴벌레가 죽어 있었다. 그 크기가, 그 모습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다가와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차라리 모든 게 꿈이길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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