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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um Nov 17. 2019

불청객 04

치앙마이와 베트남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 몸은 인천 공항에 도착했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호찌민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아내는, 이제야 정신이 좀 드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고 고백했다. 오토바이 굉음이 안 들리는 것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너무 편안하다고 했다. 입 밖으로 그 말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아내의 말은 사실이었다. 오토바이 소리는 더 들려오지 않았다.


아내만큼 나는 소리에 민감한 편은 아니지만, 오토바이 소리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싫었다. 오토바이 소리로 가득 찬 베트남 도로를 건너는 것은 그 자체로 공포였다. 

누군가는 베트남에서 도로를 건널 때 달려오는 오토바이를 보지 말라고 했다. 묵묵히 앞만 바라보면서 멈추지 말고 걸으라고 했다. 그러면 오토바이들이 알아서 피해 갈 것이라고 했다. 무단횡단을 할 때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하지만 이론은 그저 이론일 뿐이었다. 이미 다른 교통문화에 적응된 몸은 그럴 수 없었다. 달려오는 오토바이를 보고 있다 보면, 도저히 길을 건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사고가 나면 대부분의 오토바이 운전자들은 대부분 책임지지 않는다는 말도 들었다. 보험에 가입하지 않아서, 뼈가 부러지고 피를 흘리면서도 도망치기 바쁘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다.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 버스 안은 놀랄 정도로 차분하고, 조용하다. 정면 모니터에서 쉴 새 없이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소리는 꺼져 있었다. 베트남 소리에 길들어있던 청각기관은 모처럼 호사를 누린다.

유일하게 들려오는 소음이라곤, 창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뿐이다. 창밖의 도로는 다른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자동차의 소리였다. 무사히 한국에 도착했다는 것이 비로소 실감 났다. 


집에 도착하니, 뜻밖에도 예상치 못한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현관문에 들어서자마자, 반갑다는 듯이 환영 인사를 건네 왔다. 얼마나 살갑게 인사를 하던지, 하마터면 나도 손을 흔들 뻔했다.


현관문 앞에서, 바퀴벌레 한 마리가 가느다란 더듬이를 살며시 흔들고 있었다. 새끼손톱만 한 크기의 작은 바퀴벌레였다. 바퀴벌레를 보고도 죽여야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오히려 애처로워 보일 정도였다. 애처롭다 못해 안쓰럽기까지 했다. 오랫동안 집을 비운 탓에 집 안에 먹을 것도 없었을 텐데, 버텨낸 게 대견스러울 정도였다. 도대체 집안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알 수 없었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부단히 애를 썼을 것이다. 여행 내내 치앙마이에서 줄곧 큰 바퀴벌레들만 상대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오랜만에 만난 고국의 바퀴벌레에 대한 반가움 때문인지, 이유는 알 수는 없었지만 죽이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가만 보니, 도망갈 여력조차 없는 바퀴벌레 같았다. 눈앞에 사람이 나타났는데도, 움직일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유일한 움직임이었던 더듬이도 멈춰 있었다. 바퀴벌레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면, 그간의 고생담을 서로 털어놓고 나누고 싶었다. 바퀴벌레는 자신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았는지 들려줄 것이고, 나는 치앙마이에서 마주한 동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물론 동족을 잔인하게 죽인 이야기는 굳이 꺼내지 않을 것이다. 


“피곤한데 뭐해? 안 들어가고?” 잠시 잊고 있었던 아내가 뒤에서 어서 들어가라고 재촉했다. 여행에서 막 돌아온 아내가 또 바퀴벌레 때문에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치앙마이에서 겪은 일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나는 아내 눈에 띄지 않게 은밀하고 빠르게 바퀴벌레를 처리하고 싶었다. 처음으로 죽이지 않고, 생포해서 집 밖에 풀어 주고 싶었다. 마음은 그랬지만, 그렇다고 맨손으로 덜컥 바퀴벌레를 잡을 용기는 없었다. 아내에게 잠깐만 현관에서 기다리라고 해놓고, 부리나케 집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져오기 위해서였다.


다시 돌아왔을 때, 바퀴벌레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아내가 서 있었다. 


“여기 있던 바퀴벌레 못 봤어?”

“봤어. 내가 죽였어.”

“당신이? 바퀴벌레를 죽였다고?”

“응”

“자기 바퀴벌레 무서워했잖아.”

“그랬었지.”

“이제 안 무서워?”

“글쎄. 아무렇지도 않던데.”


분명, 아내는 달라져 있었다. 바퀴벌레만 보면 소리치고, 도망가기 바빴던 아내였다. 아무래도 다른 건 몰라도, 바퀴벌레에 대해서만큼은 아내가 내성이 조금 생긴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나도 좀 달라진 것 같았다. 바퀴벌레를 볼 때마다 무조건 죽이느라 정신없었는데, 이런 감정이 생길 줄 나도 몰랐다. 때때로 여행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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