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오수행 기차를 탔다. 순창에 있는 아내의 이모님에게 가는 중이다. 이모님 댁은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산허리에 자리 잡고 있다. 마당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일품인 곳이다. 섬진강 줄기와 함께 어우러져 펼쳐진 광활한 논밭이 머리를 개운하게 만든다. 그 모습도 멋지지만, 아침에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특히 장관이다. 순식간에 주변의 논밭을 감싸 안는다. 가만히 서서 바라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몽환적인 분위기에 취하게 된다.
이렇게 멋진 풍경을 지닌 집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벌레도 참 많다. 시골집이라는 걸 고려해도, 유독 벌레가 들끓는다. 아내는 출발 전부터 벌레 걱정을 했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처음 이모님 댁을 방문했을 때, 아내는 기겁했다. 집 안팎에서 예고 없이 등장하는 벌레들 때문에 도망 다니느라 바빴다. 특히 아내가 유난히 싫어하는 다리 많은 벌레가 자주 출몰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아내 곁에 장모님이 계셨다는 것이다. 아내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 탁 소리와 함께 벌레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장모님의 벌레 잡는 솜씨는 여전했다.
오랜만에 방문한 이모님 댁은 변함없었다. 풍경도 여전히 아름다웠고, 벌레도 변함없이 들끓었다. 특히 돈벌레가 눈에 자주 띄었다. 몇 마리를 보았는지 세다가 결국에는 포기할 정도였다. 오늘은 이걸로 끝이겠거니 마음을 놓았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다크호스 한 마리가 등장했다.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용감하게 거실을 횡단하는 놈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녀석이었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색 몸에 밝은 색 다리를 지닌 벌레였다. 손가락 네 마디쯤 되는 벌레는 아내를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아내는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엄마! 지네. 지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미 지네를 타격하는 손이 있었다. 빛보다 빠른 장모님의 손이었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서,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내는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한동안 몸서리를 쳤다.
그날 밤, 어둠 속에서 얼마나 많은 벌레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는지 볼 수 없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다음 날 아침. 냉장고 문을 열던 아내가 또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악! 지네! 지네!” 아내의 발밑에 지네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어제 죽은 지네와 같은 녀석이었지만, 조금 더 크고, 조금 더 길었다. 죽은 지네가 밤사이에 부활한 것만 같았다. 아내 바로 옆에 서 있었던 나는 당황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묵묵히 지네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네는 꼼작도 하지 않았다.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우물쭈물 망설이고 있던 나를 제치고 등장한 구원투수는 장모님이었다. “엄마! 엄마! 지네 그냥 죽이지 마! 잡아서 닭한테 줘.” 정말 놀랍게도,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아내가 장모님에게 작전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장모님의 손에는 어느새 집게가 들려 있었다. 단 한 번의 집게 질로 정확하게 지네를 집어 올렸다. 침착하고, 절제 있는 동작이었다. 집게에 잡힌 지네는 그제야 몸을 꿈틀대기 시작했다. 너무 늦은 발버둥이었다.
장모님이 먼저 현관을 나서고, 멀찌감치서 아내가 뒤를 쫓았다. 아내는 모처럼 신나는 표정이었다. 때마침 요리 중이었던 나는 주방을 벗어날 수 없었다. 잠시 후. 닭장에서 돌아온 아내는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무용담을 털어놓았다.
“아! 글쎄! 닭들이 눈앞에 지네를 흔들면서 보여줘도 반응이 없는 거야. 13마리 모두 생전 처음 지네를 보는 닭처럼 멀뚱멀뚱 서 있었어.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엄마한테 그냥 닭장 안으로 지네를 휙 던져주라고 했지. 먹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고. 그랬더니 호기심 많은 토종닭 한 마리가 슬금슬금 다가오는 거야. 몇 번 툭툭 부리질을 하고 나니까, 지네가 입에 물려 있는 거 있지. 갑자기 난리가 났어. 암탉이 고개를 든 순간, 지켜보던 다른 닭들이 갑자기 눈빛이 싹 변하는 거 있지. 암탉한테 막 달려드는 거야. 입에 지네를 문 암탉은 부리나케 도망가고, 나머지는 사력을 다해 쫓아가고. 순식간에 닭장 안이 엉망이 됐어. 그 광경을 자기가 봤어야 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알아?”
“그래서 지네는 어떻게 됐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
닭장을 다녀오신 장모님은 뭔가 못내 아쉬우신 것 같았다. 어젯밤, 그냥 죽여버린 지네가 계속 아깝다고 하신다. 집 안에 지네가 또 없을까 하시며, 여기저기 기웃거리신다.
그러고 보니, 단 한 방에 죽었던 간밤의 지네는 행운아였다. 아침에 잡힌 지네에 비하면 말이다. 닭장에서 갈가리 몸이 찢겨나간 지네는 분명 지옥을 경험했을 것이다. 난 더는 지네가 나타나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 편이 모두에게 해피엔딩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