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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 셋째 날, 산책 여행기

데이비드 스트리트 / 잉글리시 비치 베이 / 스탠리 파크를 걷다

by muum
스탠리 파크를 가지고 있는 밴쿠버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어.
그 공원 하나 만으로도 여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밴쿠버에서의 셋째 날. 잉글리시 비치 베이를 거쳐서 스탠리 파크까지 걷기로 했다. 여유가 된다면 그랜빌 아일랜드까지 다녀올 예정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하와이에서 한 달 내내 지겹도록 보았던 바다였는데, 밴쿠버에 도착하고 나니 또 바다가 보고 싶어 졌다.


숙소에서 잉글리시 비치 베이까지는 2km 남짓. 여러 길 중에서 데이비드 스트리트를 따라서 걸어 보기로 한다. 길 한복판에 서 있는 건물이 유난히 발길을 잡아끈다. 아무리 봐도 화장실처럼 보이는데, Washroom이라고 적혀 있다. 캐나다에서는 화장실을 Washroom이라고 하는구나. 유료 화장실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무료다. 역시 인간의 싸는 권리에 대해 인색하지 않은 멋진 나라다.

무지개색 횡단보도가 또 발길을 멎게 한다. 횡단보도에 대한 미적 감각이 좀 지나친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잠시 뒤에야 그 의미를 깨달았다. 거리 곳곳에서 보이는 보라색 깃발 아래 무지개 깃발도 함께 펄럭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한테 우리가 걷는 이 거리가 좀 특별한 거리일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거리를 둘러보니 유독 남자 커플들이 눈에 많이 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게이들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동성애자들이나 게이들과 관련된 거리일 거라는 나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데이비드 스트리트는 실제로 게이를 위한 거리로 유명했으니까.


잉글리시 비치 베이에 거의 다 와 갈 무렵 거대한 조각 군상들이 손님을 맞는다. 총 15개의 동상이 저마다 익살스러운 자세를 취하고 있다. 지나는 누구라도 카메라를 꺼내게 만드는 마력의 동상들이다. 예 민준이라는 중국 작가가 만든 작품이었다. 작품 제목은 Laughing men. 제목처럼 모두 개구쟁이처럼 웃고 있다. 그사이에 몰래 숨어서, 기꺼이 나는 16번째 동상이 되어 본다. 그녀는 이제야 작품이 완성되었다고 하면서, 까르르 배꼽을 잡고 웃는다.


잉글리시 비치 베이는 바다라기보다는 거대한 어장처럼 느껴졌다. 바다를 둘러싸고 있는 육지, 바다 위에 떠 있는 수많은 배가 시선의 확장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하와이의 끝없이 늘어진 광활한 수평선에 너무 길들어 있었나 보다. 나의 눈은 벌써 피로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나마 위로가 되었던 것은 생전 처음 보는 조류의 등장이었다. 유유히 잔디밭을 거닐던 그 새가 캐나다구스라는 것을 알게 된 그 순간. 머릿속에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캐나다구스는 의류 브랜드라는 고정관념이 바뀌고 있었다. 캐나다구스는 살아 움직이는 기러기라는 새로운 개념이 자라고 있었다.


밴쿠버의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아스팔트로 된 길을 걷는다. 이 길이 굳이 아스팔트여야만 했을까? 아름다운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는 길이라서 더욱 아쉽다. 익숙했던 편리함을 포기하고,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을. 익숙하고 편리한 아스팔트 길을 포기하고, 불편한 흙길을 꿈꾸는 나는 한낱 몽상가일지도 모른다.

거대한 어장처럼 보였던 바다도 자꾸 걷다 보니 잔정이 든다. 시린 바닷바람에 연신 코를 훌쩍여도 이상하게 머리는 계속 맑아지기만 한다.


스탠리 파크는 넓었다. 부지런히 걷다 보면 다 둘러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은 부질없는 욕심이었다. 스탠리 파크를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초짜 여행객들이나 꿀만 한 꿈이었다. 스탠리 파크 안에 들어서는 순간, 마음을 고쳐 잡았다. 걸을 수 있을 만큼만 걷는 걸로.


몇 살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거대한 나무들이 자꾸 쉬었다 가라고 손짓을 한다. 느리지만 강렬한 손짓이다. 손짓은 어느새 주술이 되어 나무를 우러러보게 만든다. 내가 정말 작은 존재라는 것. 아무것도 아닌 내가 무척 크다고 착각했던 것. 그리 길지도 않은 삶을 아등바등하면서 살아온 것. 미처 준비도 되지 않았던 고해성사들이 연이어 터져 나온다. 눈에 보이지 않은 신성함에 이끌려 나는 선채로 발가벗겨진다.


노란색 안내판이 등장할 때마다, 어디로 갈 것인지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길이 갈라지는 곳에는 어김없이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노란색 안내판 아래 경고문은 개 주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목줄을 하지 않은 개는 최고 벌금이 $2000. 물론 개가 아니라 개의 주인에게 내려지는 벌금이었다. 개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 벌금 때문인지는 몰라도 모두 목줄을 하고 있었다. 사나운 개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방심하고 걷다가, 길목에서 야생의 흔적을 발견하고 흠칫 놀라고 말았다. 포식자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새 한 마리가 포식자의 배 속으로 들어간 것은 확실해 보였다.

길은 끊임없이 변주하고 있었다.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죽어 있는 나무조차 언젠가는 다시 살아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작은 나무가 큰 나무에 기대고, 이끼가 아픈 나무를 감싸고, 튼튼한 나무는 약한 나무를 지켜주고 있었다. 숲의 질서를 보면서, 괜스레 인간의 질서를 꾸짖어 본다.


로스트 라군이 잠시 쉬었다 가라고 붙잡는다. 바쁘지 않은 사람도, 앞으로 바빠질 사람도 공평하게 한 자리씩 준비되어 있다고 속삭인다. 의자에 앉자마자, 오리들의 현란한 환영식이 시작된다. 왁자지껄한 소란함이 고요한 호수에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짧지만 요란했던 환영식이 끝나자마자, 로스트 라군은 한없이 고요해진다. 카메라의 셔터음마저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정적이다. 그 고요함에 나를 묻는다. 어느새 H도 말이 없다.


로스트 라군을 떠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다시는 이곳을 찾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방문이다. 더는 아무것도 잃을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로스트 라군에 무언가 두고 가는 기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로스트 라군을 벗어나서 로즈가든으로 들어선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장미 한 송이 피어있지 않은 로즈가든이었지만, 잔디밭에는 장미 대신 캐나다구스가 잔뜩 피어 있었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사진 찍히는 걸 즐기는 캐나다구스들이었다. 캐나다구스 때문에 H는 즐거워한다. 캐나다구스가 똥 사는 모습을 보면서 H가 자지러진다. 고양이 똥 같은 새 똥은 처음 봐! 새 똥이 왜 이렇게 크고, 단단하지? 한참을 앉아서 새 똥을 연구하던 H. 그런 H를 뒤에서 관찰하는 캐나다구스들. 이런 극적인 반전이 없었다면, 로스트 라군에 대한 후유증이 꽤 오래갔을 것이다.


스탠리 파크 인포메이션을 마지막에 만났다는 것은 차라리 다행이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길을 걸었던 것은 뜻밖에도 좋은 선택이었다. 이곳에 있는 커다란 지도를 미리 보았다면, 오늘처럼 편안하게 스탠리 파크를 걷지 못했을 것이다. 스탠리 파크의 모든 길을 걷겠다고 작정했을지도 모른다. 부질없는 욕심을 부리다가 틀림없이 H를 힘들게 만들었을 것이다.


인포메이션을 벗어나자마자, 요새 같은 빌딩들이 등장한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요트들이 바다 위에서 춤을 춘다. 값비싼 요트에는 전혀 관심도 보이는 않는 그녀. 그러나 때 이른 벚꽃 앞에서는 수줍게 웃는 그녀. 저런 여자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복에 겨워 미친 듯이 셔터를 눌러 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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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리시 비치 베이에서 스탠리 파크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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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파크 안에 있는 로스트 라군이 쉬었다 가라고 붙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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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 가든의 캐나다 구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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