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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호놀룰루를 기억하는 방법

하와이에 도착한 첫날 어디선가 기분 좋은 향기가 난다

by muum


기분 좋은 향기가 난다. 꽃 내음 같기도 하고, 풀 내음 같기도 하다. 그 향기를 처음 맡았을 때, 좋은 향수라고 생각했다. 누구인지 몰라도 정말 좋은 향수를 쓰는군. 주변에 감각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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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단어를 아주 싫어한다. 단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뜻 때문만은 아니다. 아마도, 이 단어가 적혀있는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그 일이 주는 압박감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그 단어 앞에 서면 나는 본능적으로 움츠러든다. 나도 모르게 과일이 된다. 출하를 앞두고서, 선별을 기다리고 있는 과일이 된다. 혹시 어딘가 썩은 곳이 있는 건 아닐까? 크기가 너무 작다고 다시 돌려보내면 어떻게 하지? 나는 분명히 멀쩡한 과일인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불안하고 떨리는 걸까?

“입국 심사관이 하는 말 못 알아들으면 어떻게 하지?”

H가 그 말을 하는 순간, 모든 게 분명해졌다. 이 불안의 원인은 소통이 안 될지도 모른다는 가정에서 온다는 걸. 정 못 알아들으면 통역 불러 달라고 하지 뭐. 속으로 그렇게 몇 차례 되씹고 나서야, 본래의 심장 박동수를 되찾는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해진 듯하다.


누군가 갑자기 쓰러졌다. 입국심사대의 긴 줄에서 누군가가 털썩 주저앉았다. 주저앉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기절하듯 누워버렸다. 순식간에 주변의 사람들이 그 여성을 둘러싼다. 여기 의사 없어요? 누군가 소리를 지르자마자, 어떤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 여성에게 다가간다. 그는 틀림없이 용기 있는 의사일 것이다. 침착하고 숙련된 솜씨로 환자를 안정시킨다. 저 여성은 운이 좋다. 아마도 무사할 것이다.


우리를 담당했던 입국 심사관은 푸근한 인상의 원주민 아주머니였다. 처음 보는 순간, 흘러넘치는 흥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소프라노 톤의 목소리, 그러나 예상 밖으로 정확하고 또박또박 영어 발음을 구사한다.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우리에게 묻는다. 갑자기, 오래전 영어 듣기 평가 시간으로 다시 되돌아간 듯한 기분이 든다.

“알로하! 부부끼리 여행 왔구나?”

너희들 신혼여행 온 거구나. 분명히 그런 뉘앙스였다. 아마도 나와 H의 나이를 잘 가늠하지 못하는 듯하다.

금세 기분이 말랑말랑 해진 H. 심사관 아주머니와 핑퐁 치듯 대화가 오고 간다. 마치 여자들의 발랄한 수다를 듣고 있는 기분이다. 내가 딱히 끼어들 이유도, 틈도 없었다.

“하와이는 처음이네. 즐거운 시간 보내.”

입국 심사관이 여권에 스탬프를 힘차게 내려찍는다. 우리가 멀쩡한 과일이라는 낙인을 받는 순간이다.


공항을 막 나서고 나니, 기분 좋은 향기가 또다시 난다. 좀 전에 맡았던 그 향기가 틀림없다. 한 번 맡으면 잊을 수 없는 향기다. 이번에는 작정하고 심호흡을 해 본다. 천천히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뱉고. 다시 천천히 들이마시고.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이 향기는 향수가 아니라는 걸. 이건 하와이의 공기다. 하와이 사람들이 마시는 공기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사방에서 그 향기가 몰려온다. 꽃향기 같기도 하고, 식물 향기 같기도 하다. 자꾸 들이마시다 보니, 향기가 점점 익숙해진다. 나도 모르게 향기가 되어 간다. 하와이 향기가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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