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 정리, 2일 차

또, 세 가지 물건이 집에서 사라지다

by muum


오늘 곁을 떠나갈 세 가지 물건은 고장 난 하드디스크, 잉크가 다 된 무인 양품 0.38mm 펜, 그리고 공모전 상패입니다. 사진을 찍고, 물건들이 건네는 이야기를 들어 봅니다.




고장 난 하드디스크가 할 말이 많은가 봅니다.


“벌써 10년이 다 됐네. 이 집에 처음 들어온 게. 이 집에 들어와서, 나에게 처음 일을 시키면서, 당신이 뭐라고 했는지 혹시 기억해? 이 정도 용량이면, 평생을 쓸 것 같다고 했어. 지금 들으면 웃기는 이야기이지만, 그 당시에 250GB면 어마어마한 용량이기는 했지.

나는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했어. 기록하고, 지우고, 기록하고, 덮어 씌우고. 그런데 평생을 쓸 것 같다는 당신의 말은 1년을 넘기지 못했지. 나의 형님뻘 되는 320GB 하드디스크가 새로 들어왔으니까. 형님이 들어오면, 나는 좀 편해질 줄 알았어. 그런데, 그렇지 않더군. 당신은 나를 PC 본체에서 꺼내서, 당신 아내의 PC에 넣었지. 본격적인 혹사가 시작된 것은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야. 당신의 아내는 정말 쉴 틈 없이 나를 괴롭혔으니까. 그 모든 원인이 게임 때문이었다는 것은 나도 알아.

나는 몇 번씩이나 아프다고 신음소리를 내곤 했어. 이대로 계속 돌다가는 곧 죽을 것만 같았거든. 이제 그만 쉬고 싶다고 소리를 질렀어. 내 신음을 못 들은 건지, 못 들은 체 한 건지 몰라도, 당신의 아내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더군. 그 순간 나는 모든 희망을 버렸어. 몸이 부서질 때까지 일하다가 죽을 팔자란 걸 직감했지. 내가 마지막 숨을 거두려는 순간. 내가 낼 수 있는 유일한 소리는 하나밖에 없었지. 딸깍. 딸깍. 딸깍.

이런! 하드디스크가 맛이 갔나 보네. 내가 막 숨을 거둔 순간, 당신이 그렇게 말했지. 몸이 부서질 정도로 열심히 일한 나에게 맛이 갔다고 연신 핀잔만 줬어. 그걸로 모든 것이 끝난 줄로만 알았어.

그런데 며칠 뒤에, 더 이상 아무 일도 할 수 없던 내게, 당신은 다시 일을 하라고 명령했지. 당신이 정말 미웠어. 그렇게 몹쓸 짓을 시켜놓고 당신이 마지막에 뭐라고 했는지 알아? 이 하드 진짜 맛이 갔네. 그게 당신이 내게 한 마지막 말이었지. 그 순간, 나는 진짜로 맛이 갔어.”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던 무인 양품 0.38mm 펜이 말합니다.


“저는 너무 홀가분해요. 제 할 일을 다 하고 가는 게 너무 기뻐요. 같이 온 다섯 명의 친구들 중에서 제가 가장 먼저 책임을 다 했다는 것도 기쁘고요. 단 한 줌의 잉크도 남지 않도록 저를 사용해 준 것도 감사해요. 제 몸 안에 있는 모든 잉크가 다 빠져버린 날. 저는 운명적으로 알 수 있었어요. 제가 곧 이 집을 떠나게 될 거라는 걸 말이죠. 그리고 이제는 알 수 있어요. 저는 이렇게 떠나가지만, 그게 끝이 아니라는 걸. 저는 기억할 거예요. 제가 이 곳에 무엇을 남기고 가는지 말이에요. 노트에 남긴 수많은 글씨들이 바로 제 몸에서 나왔다는 것을 꼭 기억할 거예요. 내가 남긴 글씨들이 저를 기억하지 못해도 이제는 상관없어요. 저는 제 할 일을 다했거든요. 후회 없는 삶을 살았어요.”


흥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공모전 상패가 마침내 입을 엽니다.


“너! 미친 거 아냐? 어떻게 나를 버릴 생각을 할 수 있어? 나는 15년 동안 책상 위에서 너를 지켜왔다고. 자그마치 15년이야. 15년. 내가 곧 너고, 네가 곧 나란 말이야.

곰곰이 한번 생각해 봐. 15년 전에 네가 나를 처음 받아 들고서 얼마나 해맑게 웃었는지 말이야. 그 날, 너는 세상을 다 가진 듯이 웃었잖아. 정성스럽게 나를 끌어안고 집에 와서, 책상 위에 고이 모셔 놓았다고. 날마다 나를 보면서 흐뭇해했잖아. 심지어는 당신의 아내도 나를 보면서 당신이 대단하다고 칭찬했다고.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나를 보는 마음이 점점 예전 같지는 않다는 것을 느끼긴 했어. 이제는 네가 나를 봐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는 것. 나도 알아. 하지만, 난 너의 자존심이잖아. 자랑거리라고. 너는 나로 인해 지금까지 존중받았던 거라고. 내가 없으면, 더 이상 아무도 네가 공모전 은상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이래도 나를 버릴 수 있어?”




고장 난 하드디스크는 호기심 많은 주인 때문에 결국 부검까지 당했습니다.

잉크가 다 된 무인 양품 0.38mm 펜의 빈자리는 새로운 펜이 대체할 것입니다.

공모전 상패는 결국 버려졌습니다.


세 가지 물건이 또 집에서 사라졌습니다.

지금까지 모두 여섯 가지 물건이 정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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