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낯선 곳에서 머리를 깎는다는 건

하와이 미용실에서 머리 깎기

by muum
저는 마네킹이 아니고, 사람이란 말이에요



긴 일정의 여행에서는 고민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다. 몸에서 자라나는 것들을 처리하는 문제다. 손톱과 수염은 스스로 해결 가능하지만, 머리카락은 좀 난감하다. 그까짓 것! 안 깎아도 그만이라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낙천적인 성격을 타고났거나, 스타일을 중시하지 않는 사람이거나, 어쩌면 원빈 같이 멋진 두상을 타고난 사람일 것이다.


불행하게도, 나는 이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머리를 짧게 깎아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 난 남자다. 머리를 깎고 일주일만 지나도 못 봐줄 정도다. 여행 중이라고 해서 달라질 일은 없었다. 하와이 여행을 시작한 지 2주가 가까워지자, 나는 결국 한계에 이르렀다.


"한국에서 전기 이발기를 챙겨 올 걸 그랬어." 뒤늦게 후회해봐도 소용없었다. 아침마다 점점 지저분해져 가는 머리를 보며, H에게 투정을 하는 게 일상이 돼버렸다.


이발기를 안 챙겨 왔으니, 그녀에게 머리를 깎아 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었다. 답답했어도 섣불리 하와이에 있는 미용실에 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내 마음에 쏙 들도록 머리를 깎는다는 보장도 없었지만, 결정적으로 가격이 너무 비쌌다. 팁까지 계산한다면, 한국에 비해 최소 3-4배 이상의 요금을 주어야 할 듯싶었다. 하와이는 인건비가 비싼 탓이다.


머리 때문에 스트레스가 날로 쌓여가는 어느 날. H가 뜻밖의 기쁜 소식 하나를 알려줬다.

"우리 자주 가는 마트 있지? 그 안쪽에 미용실이 하나 있어. 우연히 가격을 봤는데, 다른데 보다 좀 싼 것 같던데."


다음 날, 눈 뜨자마자, 한 달음에, 미용실부터 찾았다. 마트 안에는 정말 미용실이 있었다. 한국의 미용실보다 여전히 비싼 가격이긴 했지만, 충분히 납득할만한 가격이었다. 어쩌면 이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를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망설였던 나보다 더 신이 난 그녀가 앞장서서 미용실에 들어섰다. 밖에서 볼 때는 아담한 미용실 같았는데, 안에 들어서니 생각보다 넓었다. 기역자로 꺾여 있는 구조라서, 숨어 있는 공간이 밖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탓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숨어있는 공간 안에서 나보다 먼저 온 손님 하나가 머리를 깎고 있었다.


처음 보는 미용사가 살갑게 인사를 건네 왔다. 빨간색 반소매 스웨터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여자였다. 겉모습만으로 짐작건대, 동남아 쪽에서 온 사람처럼 보였다. 여자는 비어있는 자리로 재빨리 나를 안내했다. 오른손에는 번쩍이는 이발기를 들고, 왼손에는 낡은 빗을 든 채로.


자리에 앉고 나서야, 다른 여자가 한 명 더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자는 내게 자리를 안내한 중년의 미용사 바로 뒤에 숨어 있었다. 키가 작고, 희끗희끗한 머리를 지닌 여자였다. 수수한 옷차림에 하얀색 조끼까지 걸쳐 입어서, 하마터면 손님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손님 같아 보였던 그 여자가 내게 다가왔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미용 가운을 내 목에 두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그 여자도 미용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떤 스타일로 깎아 드릴까요? 미용사는 묻지도 않았다. 대신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내게 책자 하나를 건넸다. 카탈로그였다. 책자를 펼치자마자, 알게 모르게 불안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편안해졌다. 영어로 어떻게 깎아 달라고 할지 하는 고민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카탈로그 안에는 20명 정도 되는 남성 사진이 있었다. 모두 다른 남성이었고, 모두 다른 머리 모양을 뽐내고 있었다. 선택의 폭은 넓었지만, 마음에 드는 머리는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그중에 평소의 내 모습과 가장 비슷해 보이는 머리 모양을 골라서 가리켰다.


나이 든 미용사는, 고개를 두 번 끄덕이고 나더니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잘 골랐다는 의미일까? 왠지 예감이 좋았다.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잘 이루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음에 쏙 드는 흡족한 머리 모양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머리를 깎기 전, 미용사는 이발기에 스위치부터 켰다. 이발기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잠시 흔들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이발기에 고정되었다. 이발기의 소리를 감별하는듯한 모습이었다. 역시 고수는 다르구나. 도구부터 먼저 점검을 하네. 그러고 나서 갑자기, 생전 처음 보는 신기한 도구를 들고 와서 내 뒤에 섰다. 그 도구를 내 머리 꼭대기에 얹었다. 내 정수리를 다 덮을 정도로 커다란 도구였다. 이게 뭐지 하는 순간, 윗머리가 잘리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도구에 나는 순간 넋을 놓고 말았다. 몸과 내 머리가 분리되는 기분이었다. 순식간에 유체이탈을 한 것 같았다.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마치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는 걸 구경하듯이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짧게 자르는 거 아냐? 너무 과감하게 자르는 거 아냐? 그런 의구심이 들 때마다, 미용사는 심호흡을 했다. 들릴 듯 말 듯 나도 따라서 숨 쉬었다.


미용사는 무아지경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거울을 아예 보지도 않고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사진 하고 똑같이 깎겠다는 다짐이나, 정해진 최소한의 규칙 따위도 없는 듯했다. 신들린듯한 손길로 머리를 미친 듯이 자를 뿐이었다. 결코 멈출 것 같지 않던 그 손길은 조금씩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멈춰 버렸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낀 건, H의 웃음소리 때문이었다.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그녀가 갑자기 킥킥거리면서 웃기 시작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 소리는 웃는 소리가 아니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는 소리였다.


나이 든 미용사의 이발기가 완전히 멈춘 순간. 동시에 그녀 뒤에 있던 중년의 미용사가 이발기를 재빨리 뺏어 들었다. 갑자기 나이 든 미용사를 꾸짖기 시작했다. 다른 손님의 머리를 깎느라 내게 미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중년의 미용사가 드디어 내 머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뭐라고 하는 건지 단 한마디도 알 수 없었다. 영어가 아닌 독특한 억양의 말이었다. 베트남어인지, 태국어인지, 어느 나라 말인지는 끝내 알 수 없었지만, 두 미용사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건 확실해 보였다.


중년의 미용사는 내 머리를 가리키면서 나이 든 미용사를 다그쳤다. 내 머리를 지적하고, 깎고, 설명하고, 또 지적하고, 깎고, 다시 설명했다. 마치 초짜 미용사에게 미용 수업을 하는 모습 같았다. 아줌마! 저는 마네킹이 아니고, 사람이란 말이에요. 옆에 앉아 있던 H는 더 이상 웃음을 참지 않았다.


그제야 모든 게 한눈에 파악되었다. 그러니까 빨간 옷을 입은 저 여자가 원장이고, 나이 든 여자는 이제 막 미용을 배우기 시작한 초보자였던건가? 원장이 야속하고 미웠다. 원장은 최선을 다해 수습 중이었지만 안타깝게도, 한 번 잘려나간 머리카락을 다시 붙일 수는 없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원장은 카탈로그에서 내가 고른 머리 모양과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어 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너무 늦었다. 야속하게도 머리카락은 점점 짧아지기만 했다. 동시에, 실낱같은 나의 희망도 같이 잘려나갔다. 거울 속의 내 머리는 카탈로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머리였다. 21번째 머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미 혼이 반쯤 나간 상태였지만, 미용이 막바지에 이르자, 놀랍게도 색다른 걱정거리 하나가 불쑥 생겨났다. 팁을 줘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이 됐다. 준다면 두 미용사 중 누구에게 주어야 하는지 그것 조차 난감했다.


결과가 어찌 됐든, 나이 든 미용사에게 팁이라도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팁마저 안 주면, 그녀가 낙담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선뜻 팁을 건네주자니 속이 쓰렸다. 거울 속 내 머리가 불쌍해 보였기 때문이다.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머리를 간신히 외면하고, 미용실을 나설 무렵. 마침내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되었다. 지갑을 열기 전, 나이 든 미용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얼마나 되셨어요? 이 미용실에서?" 그녀가 내 말을 알아들은 걸까? 내 고민을 알아챈 걸까? 조심스레 손가락 세 개를 펴 들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굳이 되묻지 않았다. 3시간인지, 3일인지, 3 달인 지 더 이상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대신 나는, 나이 든 미용사 손에 3달러를 따로 쥐어 주었다.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은밀하고 조용한 손길이었다. 미용사는 그 3달러를 황급하게 숨기고 나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기 시작했다.


미용실을 나서자마자, H가 또 웃기 시작했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하면서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사레가 들어 자지러질 때까지 내 머리를 보고 웃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우리의 여행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