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 정리, 8일 차

스물다섯 개의 물건이 정리되다

by mu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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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정리될 사물 세 가지입니다.

테이프의 기능을 잃은 마스킹 테이프, 유통기한이 지난 선크림, 그리고 유통기한이 지난 소독약이 선택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마스킹 테이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거 알고 있어? 내가 이렇게 몹쓸 몸이 돼버린 것은, 당신 탓이라는 거? 당신이 나를 너무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단 말이야. 이 상태로 얼마나 오랫동안 숨어 있었는지 알아?

오래전에 그렇게 만들어 놓고, 가끔씩 꺼내서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 테이프가 떡이 됐다는 둥, 잘 안 떨어진다는 둥, 이 테이프는 못 쓰겠다는 둥, 그런 불만만 잔뜩 늘어놨어. 더 웃긴 게 뭔지 알아? 이 테이프는 이제 못 쓰겠다고 한참 투덜대 놓고, 나를 슬그머니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곤 했다고. 아니 도대체 쓰지도 못하는 나를, 버리지도 않겠다는 건 도대체 무슨 심보야?

그렇게 방치해 두면, 저절로 내가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그게 얼마나 잔인한 건지는 알아? 오래전에 테이프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린 내 마음을 한 번이라도 헤아려 본 적 있어? 나는 이미 오래전에 버려져야 했을 몸이라고. 당신의 귀찮음, 우유부단함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거, 잊지 말라고.”


유통기한이 지난 선크림이 할 말이 있나 봅니다.


“사람들은 정말 이상해. 언젠가 자신들이 죽는다는 것을 종종 잊어버리는 것 같거든. 하물며 나 같은 물건도 수명이 있는데 말이야. 더 이상한 건, 정해진 수명 안에 다 사용하지도 못하면서 욕심을 잔뜩 부린다는 거야.

나를 한 번 보라고. 내 유통기한은 1년이었어. 자그마치 1년이나 됐다고. 그런데도, 기한 내에 다 사용하지도 못했어. 그런 상태로 나를 버린단 말이야? 내 몸 안에는 아직도 선크림이 꽤 남아 있는데도?

사놓고 깜빡 잊어버렸다고?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참! 편리하네. 필요하다고 정작 살 때는 언제고? 필요 없어지면 잊어버리면 되고.

다음부터 선크림을 살 때면 말이야, 욕심을 좀 줄이라고. 나 같은 선크림이 또 나오는 건 정말 불행한 일이잖아?”


유통기한이 지난 소독약도 거들 말이 있나 봅니다.


“유통기한이 다 돼서 버려지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아. 더군다나 내용물이 아직 남아 있는대도 말이야. 내가 선크림 하고 역할이 다르다는 것? 물론 나도 알아. 나는 그런 기능으로 태어나지 않았지. 선크림은 그냥 바르면 되지만, 나는 누군가 다쳐야 사용되는 운명을 타고났지. 내 본연의 임무가 소독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고.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쓰이지 않을수록 더 좋은 거겠지.

필요할지 몰라서 샀는데, 그동안 소독할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도 잘 알아. 나를 사용할 일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겠지.

내가 유일하게 화가 나는 건 말이야. 나를 사놓고, 내가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몰랐다는 거야. 당신 언젠가 가시 박혔던 날 있었잖아? 그 날 나는 얼마나 기대했는지 몰라. 몇 달 만에 출동할 일이 생긴 날이었거든. 그런데, 당신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알아? 소독약이 어디 있지? 어디 있더라? 그렇게 말하고 엉뚱한 곳만 뒤적이고 말았다고. 결국, 나는 단 한 방울도 쓰이지 못했어. 그럴 거면, 나를 왜 이 집에 데려온 거야?”




마스킹 테이프는 테이프의 기능을 잃은 지 너무 오래되었습니다. 이제야 버려졌습니다.

유통기한이 지난 선크림을 버리고 나서, 선크림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찾아낸 선크림도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유통기한이 지난 소독약도 버려졌습니다. 소독약을 또 살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다음번에는 눈에 잘 띄는 곳에 둘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모두 스물다섯 개의 물건이 정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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