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 정리, 28일 차

원본은 버려지고, 디지털이 살아남던 날

by mu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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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이건 정말 뜻밖인데.

우리를 이렇게 버릴 생각을 다 하다니 말이야.

우리를 절대 못 버릴 거라고, 우리는 끝까지 살아남을 거라고, 우리끼리 내기까지 했는데 말이야.

- 나도 고민이 많았어.


그렇게 결정했다니 뭐 별 수 없지. 그런데, 우리들이 어떻게 한 자리에 모이게 됐는지 혹시 기억하고 있어?

-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우리가 고치지 못하는 버릇이 하나 있거든. 행사에 다녀올 때, 전시를 보러 다녀올 때,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무언가를 꼭 하나씩 챙겨 오거든.


그러면 우리 셋 다 어디에서 가져왔는지도 기억하고 있단 말이야?

- 물론이지. 맨 왼쪽의 CITY FESTA 팸플릿은 제2회 도시여행자 여행 페스티벌이 열렸을 때 챙겨 온 거야. '도시여행자'라는 카페에 들렀다가 가져왔지. 가운데 있는 건 대만 여행 갔을 때, 타이베이 미술관에서 가져온 거야. 세 번째 팸플릿은 타이베이 공항에서 교통정보를 알아보려고 챙긴 거고.


오! 우리가 온 곳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네. 그 정도로 우리를 각별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건, 아직도 나름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인데?

- 그럼, 당연하지. 너희들 모두 각별한 추억을 가지고 있거든. 다시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것들이고. 너희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당시의 소중한 기억도 떠오르기도 하니까.


그런데 왜 우리를 버리려고 마음먹은 거야?

- 버리려고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어. 너희들 모두 각별한 물건들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감정들과 사연은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게 아니더라고. 그건 우리가 너희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었던 거야.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고 나니까, 너희들은 그냥 평범한 팸플릿에 불과하더라고. 겉으로 보기에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어.


당신! 많이 냉정해졌군. 음. 우리도 말이야. 우리가 그냥 평범한 종이 쪼가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 그래서 한동안, 우리를 소중하게 모셔놓은 당신들이 더 이해가 안 갔던 거고. 더군다나 우리 같은 물건들은 돈하고 아무 상관도 없잖아. 비싼 값어치가 나가는 것도 아니고, 오랫동안 보관한다고 가격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 당연히, 돈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 추억이라는 건 돈으로 거래되는 게 아니니까.


그 이유만으로 우리를 버리기로 작정한 거야?

- 아니! 그건 출발에 불과했어.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거든. 이 팸플릿을 평생 가지고 다닐 수 없겠다. 죽을 때까지 지니고 다닐 수 없으면 지금 버리나, 나중에 버리나 어차피 무의미하다. 여행에 대한 좋은 추억은 이런 팸플릿 속에 숨어 있는 게 아니다. 가슴에 남기는 거다.


그런 깨달음까지 얻었단 말이야?

- 결정적인 게 하나 더 있어. 너희들 모두 버리기 전에, 스캐너로 스캔을 해 놓았거든. 덕분에, 너희들이 그리워지거나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볼 수 있지.


잠깐만. 잠깐만. 지금 우리를 복사했다고 했어? 그건 그냥 디지털 파일일 뿐이라고. 그건 허구야. 물성을 지니지 않은 가짜라고. 손에 잡히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아. 영혼이 없는 것들이란 말이야.

- 그래,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 네가 말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너희들은 버려지는 거고, 디지털 파일은 살아남는 거야. 디지털에게 영혼은 없을지 모르지만, 언제 어디에서든지 꺼내 볼 수 있거든. 물성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무게도 나가지 않는단 말이야.


이런. 바보 같은 경우를 봤나. 그러니까, 지금 오리지널을 버리고, 허구뿐인 디지털 파일을 보관하겠다는 거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새겨들어. 당신은, 아니 인간은, 인간은 말이야. 디지털로 만들어지지 않았어. 당신의 뼈, 당신의 피, 당신의 몸을 보란 말이야. 당신의 몸은 물성을 지닌 몸이야. 디지털이 아니라고. 그런 몸이, 디지털을 보면서 위로와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착각이고, 기만이야.

내가 장담하는데 말이야. 우리를 카피한 디지털 파일에서 당신은 아무런 향기도 맡지 못할 거야. 0과 1로만 이루어진 그 안에는 아름다운 추억 같은 게 끼어들 틈 같은 건 애초부터 없단 말이야.

- 그래. 솔직히,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다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디지털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다는 거야. 우리는 이제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가 없어. 디지털이 가지고 있는 위험 못지않게 위험을 능가하는 편리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 나는 내가 죽을 때까지 그 안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어. 벗어나야 할지, 벗어나려고 해야 하는 건지, 벗어날 수 있는 게 정말 가능한 건지도 잘 모르겠단 말이야.

인간들은 한 번 걸어온 길을 뒤돌아서 걸어간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 그리고 한번 맛 본 달콤함을 절대 잊지 못하거든. 어쩌면, 독이 든 달콤한 사탕을 입에 넣어 주어도 뱉지 않을 거야. 죽기 전까지 달콤한 사탕을 계속 빨다가 죽을 거야.


결국 우리는 버려지고, 디지털만 살아남겠군.

- 미안해. 나도 달콤함을 맛 본 한 명의 인간에 불과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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