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 정리, 29일 차

컵이 늘어날수록 이상하게도 마음은 불편해진다

by mu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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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니, 집안에 컵이 단 한 개도 없을 때가 있었다.

컵다운 컵이 하나도 없으니까, 아무 그릇이나 잡히는 대로 컵이 되었다.

혹시라도 손님이 찾아오면, 아껴두었던 일회용 컵을 꺼냈다.

컵이 하나도 없어도, 그다지 불편한 것은 없었다.


아내는, 그래도 집 안에 컵이 몇 개는 있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나 역시, 일회용 컵을 계속 쓰는 것은 낭비라는 생각도 들었다.

크게 불편한 것은 없었지만, 컵을 사기로 했다.


손잡이가 달리고 예쁜 캐릭터가 그려진 컵 네 개를 마련했다.

컵 하나 없던 집 안에 컵이 갑자기 네 개나 생기고 나니까 기분이 좋았다.

이제 더 이상 컵은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커피를 사면 공짜로 컵 하나를 준다고 했다. 커피를 샀다.

그런데 어느 날, 코코아를 사면, 컵도 같이 준단다. 코코아도 샀다.

그런데 어느 날, 물병을 사면, 투명한 컵도 같이 준단다. 물병도 샀다.

그런데 어느 날, 넓적한 컵이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넓적한 컵 두 개를 샀다.

그런데 어느 날, 텀블러가 있으면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텀블러도 두 개 샀다.

그런데 어느 날, 여행지에서 마음에 드는 컵 두 개를 보았다. 기념품으로 컵을 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안에 컵이 열세 개가 놓여 있었다.

그동안 우리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도대체 컵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나는 이렇게 많은 컵을 한꺼번에 마련한 기억이 나지 않는데.

혹시 컵과 컵이 결혼해서, 몰래 컵을 낳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컵이 스스로 자가 분열이라도 일으켰던 것일까?


컵이 하나도 없을 때는 마음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는데,

많은 컵을 가지고 나니까 오히려 마음이 불편해진다.


안 쓰는 컵 두 개를 추려낸다.

안 쓰는 컵 두 개를 버린다.

여전히 마음은 불편하다.


집 안에는 아직도 열한 개의 컵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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