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 도착한 날 우리는 누군가의 불행을 모른 척 지나쳤다
그 순간에는 몰랐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죄책감이 드는 거야.
기차 여행이 끝나간다.
승무원들이 통로를 분주히 오가기 시작하고, 안내 방송에서 밴쿠버라는 단어가 자주 들리기 시작했다. 대각선에 앉은 남자아이가 짐을 정리하기 시작하자, H는 자세를 고쳐 잡기 시작했다. 밴쿠버는 이 기차의 종착역이자, 우리의 종착역이었다. 하지만 종착지에 도착했다는 즐거움을 만끽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밴쿠버 역에 내리자마자, 해결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재스퍼 역에서 미처 해결하지 못한 비아 레일 보상 문제가 남아 있었다. 담당 직원을 만나면 막상 영어로 어떻게 대화를 나누어야 할지 걱정이 앞서긴 했지만, 재스퍼에서 했던 것처럼만 하면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다.
밴쿠버는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물론 상대적인 따뜻함이긴 했지만, 한껏 경쾌해진 마음은 이미 봄 길을 거닐고 있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온몸의 감각 기관들은 서둘러 기지개를 켜느라 바쁘다. 오랜 시간 동안 기차 안에 앉아 있었던 후유증 탓이다. 다리는 걷는 법을 잊기라도 한 것처럼 자기들 마음대로 움직였다. 짐가방을 손으로 의지한 채로 멈춰 서서, 우리가 타고 온 기차를 바라본다. 저 기차에서 80시간 가까이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사람들은 모두 한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출구 탓이다. 기꺼이 무리 속으로 섞여 들어가서, 사람들이 지나간 길을 따라서 걷는다.
밴쿠버 역은 어수선했다.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우리는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역 안 어딘가에 있을 노란색 비아 레일 안내판을 찾느라 두리번거린다. 우리가 찾던 그곳은 가장 구석에 숨어 있었다. 은발의 백인 할아버지가 홀로 앉아 있었다. 창구 바로 앞에 이르기 훨씬 전부터, 할아버지는 우리를 관찰하고 있었다. 검은색 뿔테 안경을 아래로 향한 채 눈만 살짝 치켜든 채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경 너머로 언뜻 보이는 인상이 무척 고집스러워 보인다. 순탄치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몰려온다.
“비아 레일 보상 때문에 왔습니다.”
미리 준비했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언가 건네 달라는 손짓을 하는 할아버지. 눈치 빠른 H가 타고 온 기차표를 건넨다. 그 표는 재스퍼 역 비아 레일 담당 직원이 새로 발행해 준 표였다. 그 표에는 밴쿠버 역 아래에 검은색 펜으로 imp라고 쓰여 있었다. 아줌마가 직접 적어준 그 단어를 우리는 important라고 이해했다. 그 단어를 보자마자,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밴쿠버에 내려서 해결해야 하는 중대한 일’로 해석해 버렸다. 아직 해결되지 못한 보상 건은 표만 보여주면 해결될 줄로만 믿었다. 그런데, 어디에서 잘못된 걸까? 할아버지는 표를 받아 들자마자,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만 하실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는 않는 눈치다. 일이 순조롭지 않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만 막연히 짐작될 뿐, 무슨 말인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도 답답했고, 할아버지도 답답해하긴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
이 한마디만 남긴 채, H는 갑자기 어디론가 뛰기 시작했다. 화장실이 무척 급한가 보다 생각했다. 잠시 후, H는 젊은 여성을 데리고 다시 나타났다. 검은색 모자에 검은색 유니폼을 입은 여성이었다. 한눈에 봐도 한국 사람처럼 보이는 인상의 그 여자에게 누구냐고 미처 물을 틈도 없었다. H는 그 여자에게 상황부터 설명하느라 분주했다. “저도 영어를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일단 노력은 해 볼게요.” H의 이야기를 다 들은 그 한국 여성은 할아버지에게 영어로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가 두 사람 사이에 한동안 오고 간다. 도대체 무슨 말이 오고 가고 있는 걸까? 그 순간, 젊은 동양인 남자아이가 우리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오기 시작했다. 여드름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에 수심을 가득 담은 채로 말이다. 그 아이는 목 부위가 다 헤진 옅은 카키색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반소매를 입기에는 이른 날씨였는데. 춥지도 않나? 보자마자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한국 사람인가? 우리 일이 궁금한 건가? 혹시 우리를 도와주려고 그러는 걸까? 그런데, 그 아이는 아무 말도 없이 그냥 곁에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자꾸 신경이 쓰인다.
“이 표는 이미 보상이 끝났다고 하시네요. 더는 남아 있는 보상 같은 것도 없다고 그러시고요.” 통역해 주던 한국 여자가 마침내 상황을 정리해준다.
“아니,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나의 말이 막 터져 나온 그때였다. 우리 곁에서 한참 동안 우리를 지켜보던 남자아이가 마침내 운을 뗐다.
“말씀 중에 정말 죄송한데요. 제가 지금 상황이 아주 곤란해서요.”
나도, H도, 통역을 해주던 여자도 놀란 눈으로 남자아이를 동시에 바라보았다.
“제가 지금 막 밴쿠버에 도착했는데요. 짐을 의자에 두고 앉아 있었는데, 짐이 감쪽같이 없어졌어요. 분명히 옆에 두었는데.”
“저런! 저런!”
“아무리 찾아봐도 안 보여요. 기차역 담당자에게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데, 제가 영어를 잘 못 해서요. 그래서 이분에게 통역 좀 부탁드리려고요. 아무래도 CCTV를 봐야 제 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아!”
우리 셋 다 동시에 안타까움이 가득한 탄성을 내뱉었다.
“여기 두 분은 대충 해결되신 거죠? 그러면, 이제 이쪽 분 해결해 드려야겠네요.”
“네, 저희는 다 해결된 것 같으니까, 빨리 가보세요.”
통역을 도와주던 여자와 짐을 잃어버린 남자아이가 돌아서서 함께 걷기 시작했다.
“그 짐 아마도 여기 노숙자 중에 누군가가 가져갔을 거예요. 이 역에 노숙자들이 많거든요. 조심하셨어야죠. 그런데, 그 짐 못 찾을 텐데.”
이런 일을 여러 차례 겪어 본 사람처럼 여자가 침착하게 남자아이에게 조언을 한다.
“그럼, 어떻게 하죠?”
남자아이의 근심 가득한 소리가 밴쿠버 역에 공허하게 울려 퍼진다.
숙소에 도착해서, H에게 물었다.
“아까 당신 밴쿠버 역에서 말이야.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어? 통역해 줄 사람을 찾을 생각 말이야.”
“그냥, 일단 한 번 찾아봤어. 역 안 어딘가에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거든.”
“밴쿠버 역 안에?”
“응, 처음 들어선 곳이 햄버거 가게였어. 동남아 쪽 여자처럼 보이는 직원이 서 있더라고. 내가 영어로 아이 원추 코리언 스텝 그랬지. 그랬더니, 그 여자가 안으로 들어가서 누굴 불러오더라고. 아까 그 한국 여자분이었어. 밑도 끝도 없이 제발 도와 달라고 했지. 그랬더니, 망설이지도 않고, 바로 달려 나오더라고. 계속 자기도 영어 잘 못 한다고 하면서. 너무 고마워서 오기 전에 초콜릿 하나 사다 줬어. 돈으로 감사함을 표현하기에는 좀 그런 것 같아서.”
“신기하네. 어쨌든 당신 다시 보이는데.”
“근데, 아까 그 남자애 말이야.”
“아! 짐 잃어버린 남자아이?”
“응. 자꾸 마음에 걸리네. 상황이 너무 안타깝고 딱했는데, 그냥 온 게 말이야.”
“그러게. 나도 그래. 돈이라도 좀 주고 올 걸 그랬어.”
“아무래도 너무 우리 생각만 한 것 같아.”
오늘 밤에 당장 잘 곳이라도 있는지, 밥은 먹었는지 그 남자아이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입을 옷이라도 좀 주고 올걸. 갑자기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죄지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괜스레 밴쿠버 역 쪽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냥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