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스퍼에 도착한 첫날 모처럼 취하고 싶었다
술을 끊은 지 꽤 오래됐어. 나 때문인지 몰라도, H도 술을 안 마신 지 오래됐어. 물론 요리하다가 술을 간혹 사용하기도 하고, 정말 축하할 일이 생기면 조금은 마시기도 하지. 그 밖의 경우에는 아무리 술을 권해도 안 마셔. 왜 술을 안 마시냐고? 언젠가부터 취하는 것이 싫어졌거든. 특히 술에 취해가는 나를 바라보는 것이 정말 싫었어. 재스퍼에 도착한 첫날, 정말 모처럼 만에 술이 마시고 싶었어. 재스퍼에 무사히 도착한 것을 H와 함께 축하하고 싶었거든. 그 날은 취하고 싶던 날이었어.
재스퍼 역에 기차가 멈춰 선 것은 저녁 7시가 갓 넘어서였다. 원래 일정보다 자그마치 8시간이나 늦어졌지만,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토론토에서 여기까지 달려오는 동안, 시간에 대한 관념이 희미해져 버린 탓도 있었지만, 굳이 재스퍼에 일찍 도착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리자마자 입안 가득 밀려 들어오는 차가움이 좋았다. 그 차가움은 토론토의 차가움과는 달랐다. 더 청량하고, 신선했다. 호흡할 때마다 이가 살짝살짝 시렸는데, 묘하게도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예약한 호텔은 역에서 북쪽으로 650m 위에 있었다. 낯선 곳에만 가면 어김없이 길치가 되어 버리곤 하는 나의 버릇은 재스퍼에서도 변함없었다. 미리 스샷을 찍어 놓은 지도가 있었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현재 나의 위치가 실시간으로 반영되지 않는 지도는 그냥 그림에 불과했다. 아무리 걸어도 예약한 호텔이 보이지 않자, 슬슬 당황하기 시작했다. 역에서부터 북쪽으로 650m를 걸어가면, 분명히 호텔이 있을 거라고 구글맵은 말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마을 안쪽 길에서 한동안 헤매다가 역방향으로 다시 걸어갈 즈음이었다.
“혹시 저 건물이 우리가 예약한 호텔 아냐?”
좀 전에 지나친 건물을 아내가 가르치면서, 나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순간. 숨어 있던 호텔 간판이 눈에 띄었다. 선명한 붉은색 배경에 하얀색 글씨가 적혀 있는 호텔 간판이었다. 아까 걸어갈 때는 왜 못 보았을까? 역 쪽에서 걸어온다면 절대 보이지 않는 벽 안쪽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더 억울한 것은, 그 간판보다 더 큰 글자로 이루어진 간판이 바로 머리 위에 있었다는 것이다. 좀전에 무심코 지나쳤을 때는 보이지도 않았던 커다란 글자가 나를 비웃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나는 예약한 호텔을 찾고 있던 것이 아니라, 내가 상상하고 있던 호텔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로비는 따뜻했다. 그 따뜻함을 만끽하기도 전에, 안경에 김이 서려 버렸다. 순식간에 바닥도 무채색, 천장도 무채색, 소파도 무채색으로 바뀌어 버렸다. 안갯속을 걷는 기분으로 로비를 가로질러 간다. 로비의 끝에서 한 여자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무채색의 표정으로 우리를 관찰하다가, 가까이 다가가자 하얀색 미소를 짓는 여자였다. 그 여자의 미소 뒤에는 붉은색 호텔 이름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길을 헤매다가 들렀던 마트에서 사온 맥주로 건배했다. 무사히 재스퍼에 도착한 것을 축하했고, 무사히 호텔을 찾은 것을 축하했고, 축하할 수 있게 된 것을 축하했다. 세상에는 온통 축하할 일 투성이었고, 모처럼 취하고 싶은 밤이었다. 오랫동안 참았던 맥주 한 모금을 마시자마자 H도 놀랬고, 나도 놀랐다. 맥주 맛이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맥주의 향은 분명히 나는데, 맥주 같지 않았다. 너무 오랜만에 마시는 맥주라서 그런 건가? 확인 차, 다시 한 모금 마셔보았다. H가 나보다 먼저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캐나다 사람들은 이런 끔찍한 맥주를 어떻게 마시는 거야?”
“그러게 말이야, 맛이 정말 이상해.”
“이 맥주. 아무리 마셔도 안 취할 것 같아.”
“그러게, 맥주 캔 디자인은 정말 잘 만들었는데 말이야. 디자인에 혹해서 산 맥주인데.”
한참 동안 맛없는 캐나다 맥주를 성토하고 난 뒤. 캔 아래에 있는 자그마한 글자를 무심코 보고 말았다. 알코올 도수 0%.
무언가에 홀린 것 같고, 왠지 속은 것 같고, 억울한 기분마저 들었다.
수많은 맥주 중에서 왜 하필 무알코올 맥주를 골랐어! H에게 핀잔을 주려다 말았다. H가 눈치채고, 먼저 고해성사를 해왔기 때문이다.
“무알코올 맥주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
다음 날, 나는 작정하고 그 마트에 다시 들렀다. 가장 먼저, 진열된 모든 맥주를 일일이 확인해 보았다. 다양한 디자인의 맥주들이 있었지만, 모두 무알코올 맥주였다. 겉모습은 하나같이 진짜 맥주처럼 생겼는데 말이다. 마트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 어디에도 진짜 맥주는 보이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캐나다에서는 마트에서 맥주를 사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슈퍼마켓, 마트, 편의점 등 어느 곳을 가도 술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한국과는 확연히 다른 문화를 캐나다는 가지고 있었다. 캐나다에서는 주 정부에서 허가한 곳에서만 맥주를 판매할 수 있으며, 마트에서는 오직 무알코올 맥주만 살 수 있었다. 밖이나 공공장소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불법이고, 차에 술을 실을 수는 있지만 개봉 해서는 안 됐다. 캐나다는 개봉된 술병을 차에 가지고 있으면 마시지 않았어도 음주운전 미수로 잡히는 나라였다.
그날 밤, 우리는 무알코올 맥주를 마실 운명이었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을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