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 정리, 34일 차

내가 왜 이런 주인을 만난 거지?

by muum


2vlhw8X988xp45Df7WYY28KrsJ3uOkvj88S8h1sJMsuKacyY1i7aXeAefjGSLFv0cgUnSWNwOQepKjbc3tT9UxKbIYoUYneIGxxjXtXd0y2qfjdRZkaZlnn8XlMPLFLwMBcx9rkt


투명한 손잡이가 혼잣말을 시작합니다.


“나는 투명한 플라스틱 뚜껑에 붙어 있던 손잡이야. 조심성 없는 주인이 나를 바닥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뚜껑과 나는 분리돼 버리고 말았지. 뚜껑이 살짝 깨지긴 했지만, 나는 조만간 원래 있던 뚜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어.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거지. 주인이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우리를 그저 지켜보고만 있긴 했지만 말이야.


그 날 이후로 나는 싱크대 서랍 깊숙한 곳에 처박혔어. 그 속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는지 몰라. 그제야, 내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 그 뒤로 단 한 번도 주인 얼굴을 본 적도 없었고, 투명한 플라스틱 뚜껑도 만나질 못했으니까 말이야.


솔직히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몰라. 모처럼만에 나를 꺼내 든 주인이 놀랍게도 이런 말을 하더군. 이건 도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 기가 막히더군. 나를 그 안에 집어넣은 게 누군데 말이야. 주인한테 되묻고 싶군. 내가 왜 이런 주인을 만난 거지?”


옆에 있는 패브릭 본드 풀도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나는 직물로 만들어진 천과 천 사이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풀이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개의 천을 서로 연결시켜 주기도 하고, 서먹서먹한 사이를 좀 더 친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지. 그뿐만이 아냐. 서로 모르고 지냈던 천, 원래부터 사이가 안 좋았던 천, 한바탕 싸움을 한 천을 다시 친밀하게 만들어 주거나 화해시켜 주기도 하지.


천과 천을 붙여야 하는 일이 생기기만 하면, 나는 당장 달려 나갔어. 사이가 안 좋다고 해서, 안 붙으려고 서로 버텨봐야 별로 소용이 없었지. 아무리 콧대가 높아도 소용없었고, 크게 싸우거나 다퉜어도 상관없었지. 둘 사이에 내가 한 번만 발라지면, 상황 끝이었거든. 좋든 싫든지 간에 딱 달라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거든.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는 몰라도, 대부분의 천들이 내가 나타나기만 하면, 벌벌 떨었어. 서로 친한 척 연기도 하고, 사이좋게 지낸다고 내 앞에서 유난히 강조하기도 했지. 일단 눈밖에 나면, 바로 눈 앞에서 붙여 버릴지도 모르니까. 모두들 내 앞에서 조심스럽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 나는 기고만장해졌어.


하지만 이런 나한테도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어. 한 번 붙여놓은 천들은 다시는 안 떨어지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됐거든. 내가 힘을 한번 쓰면, 천과 천 사이를 영구적으로 붙여 놓게 만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건 나 때문이 아니라, 바느질 덕분이었던 거야. 그러니까 내 역할은 주인이 바느질을 하기 전에 임시로 천과 천 사이를 붙여 놓는 역할을 맡았던 거지.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내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 줄 몰라. 나는 모든 천들이 단단히 붙어있는 것이 나의 힘 덕분이라고 착각했던 거야. 그 뒤로, 나는 내 약점이 들키지 않도록 정말 조심스럽게 행동했어. 일부러 더 강한 척하기도 했지. 주인한테 이 사실을 들켜 버리면, 버림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우려하던 일이 마침내 터져 버리고야 말았어. 나의 약점을 들켜버리고 만 거지. 나를 구입한 주인은 아마도 나의 약점을 모르고서 나를 구입했던 것 같아. 나를 이용하면, 영구적으로 천을 붙일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 같아. 그러지 않고서는 내 약점을 알게 된 순간, 그렇게 당황하는 표정을 지을 리가 없었지. 내 약점을 알게 된 주인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나를 몇 번씩이나 시험해 봤어. 결과는 마찬가지였지. 마침내 나는 내팽개쳐지고 말았어.


그 후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몰라. 날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몰라. 한 때는 세상의 모든 천들을 내가 붙일 수 있다고 믿었었는데. 내가 정말 강하다고 믿었었는데.

그렇게 내팽개치고 나니, 나는 금세 늙어 버렸어. 폭삭 늙어 버렸어. 이제는 더 이상 단 한 장의 천도 임시로 붙일 수도 없게 되어 버렸어. 이제는 온몸이 다 말라 버렸거든.”


마지막으로, 락스라고 적혀 있는 공병이 말합니다.


“여기 올 때는 가득 찬 병이었는데, 갈 때는 빈 병이구나.”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사물 정리, 33일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