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 정리, 33일 차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때 편한 거잖아요

by muum



<베란다 채소밭>이라고 적혀 있는 책이 추억을 회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가 언제였더라? 이제는 기억이 희미해져서, 생각조차 안나네요. 쉿! 제발 조용히 좀 해봐요. 오래전에 있었던 기억 좀 더듬어 보게 말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여기 사는 사람들하고 같이 살게 된 게 언제였냐면요, 음~ 아마 5-6년쯤 된 것 같아요.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처음 세상에 태어난 게 2010년 9월 20일이었으니까 대충 그때쯤일 거예요.


물론,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은 아니었죠. 이렇게 작은 집이 아니었거든요. 그리고 제 기억에 그때는 분명히 베란다가 있었어요. 꽤 넓은 베란다였거든요. 사실 오기 전부터, 내가 가게 될 집에 베란다 하나쯤은 당연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베란다가 없는 사람들은 저를 절대로 구입하지 않거든요. 저를 구입하는 사람들의 소원도 대부분 한결같았어요. 모두들 베란다에 근사한 채소밭을 만드는 게 꿈이었거든요.


제가 인기 있었던 이유요? 저는 베란다에 멋진 채소밭을 만드는 다양한 방법을 알고 있었거든요. 제가 하라는 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실패할 확률도 거의 없었어요.

저를 구입했던 사람도, 처음에는 제 말을 잘 들었어요. 의욕도 정말 대단했죠. 베란다에 근사한 텃밭을 만들겠다는 일념 하나로 똘똘 뭉쳐 있었거든요. 처음 몇 번은 시키는 대로 잘 따라 했어요. 텃밭을 만들어 본적이 아예 없었으니까,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불행하게도, 채소들이 생각만큼 잘 자라지 않았어요. 잘 자라는 건 고사하고, 어느 날부터인가 갑자기 채소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죠. 대부분의 초보들이 저지르는 실수 때문이었어요. 초보들은 성급하거든요. 지나치게 빨리 결과를 보고 싶어 하는 탓에 과도한 관심을 쏟아부어요. 덕분에 쑥쑥 자라나야 할 채소들이 날마다 힘들다고 불평을 하기에 바빴어요. 물도 제발 그만 달라고 했는데, 너무 많이 주기 일쑤였고, 영양분이 부족하지도 않았는데, 비료를 주기도 했죠. 주인의 과도한 관심이 오히려 채소들에게는 독이 됐던 거예요.


그런데 이게 채소들한테만 적용되는 게 아니잖아요. 사람도 마찬가지잖아요. 너무 지나친 관심과 애정을 쏟아부으면, 결국에는 서로 힘들어지잖아요. 서로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때, 편하잖아요. 때때로 그걸 잘 알면서도, 정작 그렇게는 못하잖아요.


채소들이 조금씩 죽어 나갈 때마다, 주인은 그게 자기 탓이었는지 몰랐어요. 너무 과도한 사랑을 주어서 그렇게 된 건지 몰랐던 거죠.


그럴 때마다 놀랍게도, 오히려 저를 탓하더라고요. 제가 잘못 가르쳐 줘서 그런 거라고 말이죠. 물론 제 안에 ‘채소들에게 과도하게 사랑을 주지 말라’, ‘지나친 관심은 오히려 독이 된다'라는 글귀 같은 건 적혀 있지 않긴 했지만요. 저는 그저 눈 앞에서 일어나는 상황이 너무 안타까웠어요. 주인에게 간곡히 부탁했죠. 침착하게, 저를 다시 한번만 끝까지 천천히 읽어 봐 달라고 부탁했죠. 그러면 더 이상 채소를 죽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요. 하지만 이미 마음이 한 번 비뚤어진 주인은, 다시는 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어요.


베란다의 채소들은 날마다 계속 죽어 나갔죠. 죽어 나가는 채소들이 늘어날수록 주인의 마음도 조금씩 차가워져 갔어요. 베란다에 멋진 텃밭을 만들겠다는 주인의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죠.


몇 년 뒤, 시골에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어요. 그 집에는 꽤 큰 앞마당이 있긴 했지만, 단단한 흙과 돌들로 채워진 마당이었어요. 이사를 마친 며칠 후, 따뜻한 봄바람이 막 불기 시작한 날이었죠.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주인이 책장에서 저를 다시 꺼내 들더라고요. 그 집 마당에 앉아서, 저를 다시 읽기 시작했어요. 끈기 있게 처음부터 끝까지 저를 다 읽었어요. 이 집에 들어온 뒤로 처음으로 저를 끝까지 정독한 날이었어요.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죠. 그 모습은 자기가 오래전에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고 있는 눈빛이었어요.


그러고 나서 어느 날부터인가 갑자기, 그 단단한 마당을 일구기 시작했어요. 한 달 내내, 돌을 골라내고, 흙을 골라냈어요. 단단했던 마당은 서서히 밭으로 변해 갔어요. 베란다 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텃밭으로 변해 갔어요.


밭이 완성되자마자, 그 텃밭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채소들이 심어졌어요.

상추, 케일, 쌈추, 토마토, 고구마, 토란, 감자, 호박, 당근, 서리태, 가지, 고추, 깻잎, 도라지, 옥수수 등 정말 많은 작물들이 그 밭에 심어졌죠. 채소들은 정말 무럭무럭 잘 자랐어요.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았어요. 정말 감동적인 순간이었죠. 제가 특별히 뭔가를 더 가르쳐 주지 않아도 될 정도였으니까요. 그 순간은, 마침내 베란다에 멋진 텃밭을 만들겠다는 주인의 오랜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죠. 물론 그곳이 베란다는 아니었지만 말이에요.


네! 저도 이제 알고 있어요. 제가 이 곳에서 떠날 순간이 되었다는 것을. 제가 더 이상 이 곳에 필요 없다는 것을 말이죠. 섭섭하지 않냐고요? 전혀 섭섭하지 않아요. 이제 곧 새로운 주인을 만날 테니까요. 그리고 새로운 주인이 베란다에 멋진 텃밭을 이루는 꿈을 도와줄 거니까요. 새주인이 성급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에요. 과도한 사랑은 모두를 힘들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더욱 좋구요.”


책 옆에 있던 변환단자 잭 두 개가 고개를 끄덕거립니다. <베란다 채소밭>이 하는 이야기에 공감을 하는 분위기입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둘 다 동시에 한 목소리로 묻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모두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저희는 사랑은 커녕, 관심도 받아본 적이 없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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