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 정리, 37일 차

실내화가 단 한 번도 이쁨 받지 못한 이유

by mu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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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레이 기능이 고장 난 플라스틱 공병을 버리려고 꺼냈습니다. 많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공병은 뭔가 억울한 일이 있나 봅니다.


“콜록~콜록~내가 고장 난 건~콜록~내 탓이 아니라고. 콜록~이것저것 막 담아 쓴 콜록~당신들 탓이지. 콜록! 콜록! 훨씬 더 오랫동안 살 수 있었는~콜록! 콜록!”


이가 나간 밥그릇을 밖에다가 한동안 방치해 두었다가 이제야 발견했습니다. 그동안 불만이 꽤 쌓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 맞아! 나는 이빨이 빠졌어.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그것 때문에 내가 버림받는 게 도대체 말이 되냐고? 자기들은 자기 이빨이 빠져도 한없이 관대하면서, 우리 그릇들이 이빨 빠지면 왜 난리법석인 거야?”


우리 집에 들어온 뒤부터, 단 한 번도 이쁨 받지 못한 실내화가 마침내 입을 열었습니다.


“작년 겨울, 나는 이 집에 없었어. 매장에 진열되어 있었거든. 그 매장에는 나 말고도 정말 많은 실내화가 걸려있었지. 나는 실내화들 중에서 가장 저렴하고, 제일 볼품없는 측에 속해 있었어. 내 주변의 실내화들은 모두 다 나보다 더 예쁘고, 하나같이 더 비싼 실내화들이었으니까. 어떤 실내화는 나보다 2배나 더 비싼 것도 있었지.


나같이 볼품없는 실내화를 찾는 사람들은 부류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어. 막상 실내화는 필요한데 주머니가 넉넉하지 않은 사람들이나, 습관적으로 가장 저렴한 물건만 찾는 사람들, 실내화 같은 것에 절대로 돈을 투자하지 않는 사람들이 주 고객이거든.


그런데 나를 구입하러 온 주인아저씨는 좀 달라 보였어. 대충 가격만 비교하고, 고민 없이 사가는 사람들하고는 달랐거든. 특이하게도, 매장에 걸려있는 모든 실내화를 다 일일이 비교해 보더란 말이야. 가격, 디자인, 마감상태 등 꼼꼼하게 일일이 따져 보더라고. 너무 오랫동안 심사숙고하길래, 일찌감치 나는 자포자기해버렸어. 이렇게 꼼꼼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절대로 나 같은 실내화는 선택하지 않거든. 진열되어 있는 실내화 모두 맘에 들지 않는다는 반증이거든. 그래서 이런 부류의 손님들은 안 사고 그냥 가는 경우가 더 많아.


그런데, 아저씨는 정말 특이했어. 그렇게 오랫동안 고민을 하더니, 최종적으로 나를 선택했거든. 처음에는 무척 어리둥절했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조금씩 기분이 좋아지더라고. 이렇게 신중하게 나를 선택한 사람이라면, 선택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런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나를 아껴줄 것이라는 믿음까지 생기더라니까.


집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나부터 꺼내놓기 바빴어. 오죽 내가 마음에 들었으면 그랬을까. 나도 빨리 아저씨 발에 쏙 안기고 싶었어. 그런데, 정작 내가 향한 곳은 그토록 고대했던 아저씨의 발이 아니었어. 놀랍게도, 주인아주머니가 나를 받아 들더군. 어! 내가 모실 주인이 아저씨가 아니라 아주머니였구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걸 느꼈지. 잠시 당황하기는 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어. 일단 아줌마 마음에 들기만 하면 되는 거였으니까. 그런데 나를 발에 신어 본 아주머니의 첫마디가 예상 밖이었어. 이거밖에 없었어? 아주머니 앞에서 득의양양하게 웃고 있던 아저씨는 살짝 당황하기 시작했어. 아저씨는 주섬주섬 변명을 시작했지만, 이내 아주머니의 결정적인 한마디가 울려 퍼졌지. 보나 마나 또 제일 싼 거 사 왔지.


아니에요. 아주머니, 아저씨가 얼마나 심사숙고해서 저를 고른 건데요. 그렇게, 아저씨를 함부로 매도하지 마세요. 가격이 싸다고 꼭 나쁜 것만은 아니란 말이에요. 아저씨! 빨리 뭐라고 답변 좀 해봐요.


내 마음은 나도 모르게 이렇게 다그치고 있었지만, 아저씨의 변명보다 아주머니의 추궁이 더 빨랐어. 내가 안쪽이 양털로 된 거 때 많이 탄다고 했잖아. 먼지도 많이 껴서, 세탁할 때 깨끗이 빨기 힘들다고 분명히 얘기했는데. 그냥 천으로 된 게 훨씬 깔끔하고 세탁하기 편하다고 했잖아. 더군다나 바닥이 이렇게 얇고 좁으면 착용감이 안 좋아서 오래 신기 힘들단 말이야. 그리고, 색상이나 디자인도 좀 괜찮은 거 사 오지. 이게 뭐야? 촌스럽게.

아주머니의 집중적인 추궁에 아저씨는 결국 한 마디도 못하더군. 겨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마지막에 이렇게 한 마디 한 게 전부였어. 그럼 이건 내가 신고, 하나 더 사 오지 뭐.

그 한 마디 덕분에 아저씨는 오랫동안 아줌마의 잔소리를 더 들어야 했지만.


어쨌든 그 날 이후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쁨 받지 못했어. 아주머니에게는 이미 싸구려 실내화라는 딱지가 붙어 버린 뒤였고, 아저씨에게는 난 그림의 떡이었으니까. 왜냐하면, 아주머니 몰래 아저씨가 나를 한번 신어 본 적이 있었거든. 나는 태어나서 그렇게 두꺼운 발은 처음 봤어. 나를 매장에서 처음 봤을 때, 아저씨가 무엇 때문에 진지하게 고민했는지 그때서야 알겠더라고. 그러니까 아저씨는 그 날 내가 자기 발에도 맞을까 진지하게 고민했던 거야. 어쩌면, 나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내가 아주머니에게 미움받을 것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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