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했던 내 거주의 흑역사

나를 위한 공간을 찾기 위해 살아왔던 삶을 추억하고 위로하다

by mu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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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뜻밖의 화두를 꺼내 듭니다


“당신 옛날에 혼자 지낼 때 말이야.”

“언제? 결혼하기 전에?”

“응. 그때 고시원에 산 적 있었잖아?”

“고시원? 무슨 고시원? 아! 맞다. 고시원에 산 적 있었지.”

“그때 어땠어?”


개복숭아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봄날 오후. 숨 쉴 때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향기가 사방에 가득한 날.

그 아련한 꽃향기에 호기심 가득한 아내의 언어가 함께 뒤섞이는 순간. 온몸에 퍼져가는 나른함이 싹 사라지고 맙니다. 느닷없는 아내의 질문에 갑자기 마음이 아득해집니다.


아내의 마음속에 갑자기 무슨 봄바람이 불어온 걸까요? 오늘같이 어지러운 봄날에 꺼내 들기에는 적절치 않은 화제 같은데 말입니다. 오래전 제가 고시원에 살았던 것을 용케 기억해 낸 노력이 가상할 정도입니다. 덕분에 마음속 심연의 공간에 꽁꽁 숨겨 두었던 저만의 흑역사를 소환하게 되는군요. 잠시 동안 기분이 떨떠름했지만, 이제는 굳이 숨길 이유도 없고, 꺼내지 못할 금기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이야기를 웃으면서 다룰 만큼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반증이겠죠. 그만큼 우리 부부가 완숙 해졌다는 거고, 그만큼 삶에 여유가 생긴 탓이겠거니, 애써 위로해 봅니다.


그때가 언제였더라? 머리 속에 가득한 거미줄을 하나둘씩 없애가면서, 기억을 더듬어 봅니다. 머릿속, 다락방 구석에 처박혀 있는 상자 하나가 눈에 들어오는군요. 먼지가 뿌옇게 쌓여 있는 기억의 상자입니다. 먼지를 털어내고, 상자를 열자마자, 갑자기 빛바랜 사진 몇 장이 우수수 떨어집니다. 사진 아래 희미하게 적혀있는 날짜를 보니, 이런! 자그마치 15년이나 지난 일이군요. 생각해보니, 그 햇수는 저희 부부에게는 꽤 의미심장한 숫자였습니다. 저희 부부가 함께한 지 어느덧 15년이나 흘렀다는 뜻이니까요. 물론 그때는 부부의 연을 맺기 전이었습니다만.


곰팡이가 가득한 집에서 독립하고 싶었습니다


아내를 만나기 전, 저는 집 없이 지내는 떠돌이였습니다. 물론, 집이 없어서 떠돌아다닌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모님과 형제들이 지내는 집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하루라도 빨리 독립하고 싶었습니다. 집안 환경이 좋은 편도 아니었고, 집에 머무는 것이 편안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볕이 하나도 들지 않았던 그 집은, 집안 어디에서도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 집에 대해 간직하고 있는 저의 유일한 기억은, 방 안 가득 퍼져있는 곰팡이들 뿐입니다. 곰팡이들을 아무리 열심히 닦아내도 소용없었습니다. 며칠 후면 더 많은 친구 곰팡이들을 데리고 나타나기 일쑤였으니까요. 덕분에 그 안에서 숨을 쉴 때마다, 곰팡이 포자들이 폐에 가득 퍼지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그 눅눅한 공간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주민등록등본에 기재되어 있는 거주지는 분명히 있었지만, 오래전부터 마음은 그 집을 떠나 있었던 겁니다. 이기적인 생각이었지만, 부모님과 형제들에 앞서서 일단 저부터라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제적인 독립은 물론이고, 주거까지 얼른 독립하고 싶은 마음이 정말 절실했습니다.


더군다나, 집과 다니던 대학과의 거리는 왕복 5시간 가까이 걸렸습니다. 말이 5시간이지, 하루에 5시간을 등하교에 소비한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제게는 날마다 왕복 5시간 이상을 등하교에 투자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학교 주변에 자취를 할 경제적인 여력도 없었습니다. 독립의 열망은 간절한데, 마땅한 현실적인 대안은 없는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겁니다.


학교가 집이고, 집이 학교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대학시절 내내 어떻게 보냈냐고요? 대학생활 대부분을 학교 안에서 먹고 자면서 보냈습니다. 본의 아니게, 학교가 가난한 저를 먹여주고 재워 주게 된 거죠. 물론 신입생 시절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사람들의 낯이 익기 전이었고, 학교환경에도 적응하기 전이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처음에는 어쩔 수없이 왕복 5시간이 걸리는 집과 학교를 부지런히 오고 갔습니다. 부족한 잠은 오고 가는 지하철에서 잘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술자리나 과제 때문에 막차를 놓치는 경우가 종종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임기응변으로 아는 선배의 집에서 신세를 지기도 하고, 학교에서 새우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학교 생활에 적응을 완전히 마치고 나서부터는, 집에 들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심지어 주말에도 일부러 집에 가지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집에 가는 것이 썩 내키지도 않았지만, 왕복 5시간이나 투자해서 집에 다녀오는 것이 바보같이 느껴졌습니다. 차비, 시간, 기회비용 등 모든 것을 따져 보아도, 학교에서 생활하는 게 훨씬 득이라는 생각은 확고해져만 갔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철도 없고 겁도 없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치기 어린 대학생이라는 방패막이 없었다면,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생활이었던 거죠. 대학교 교내에서 먹고 잔다는 것은, 솔직히 거지랑 별반 다를 게 없는 삶이었습니다. 밥 먹을 돈이 없어서, 여기저기 밥을 얻어먹고 다닌날도 참 많았습니다. 처음 얻어먹는 것이 어려울 뿐이지, 몇 번 하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점점 더 뻔뻔해지더군요. 얼마나 많이 얻어먹고 다녔는지, 나중에는 사람들이 알아서 다들 피해 다녔습니다. 밥때만 되면, 멀찌감치 피하는 친구들도 자연스럽게 생겨나더군요. 그나마 굶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은, 먼저 밥을 챙겨주는 착한 친구들이 주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잠 잘 곳만큼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학교에 오랫동안 있다 보니, 학교 안에 잠잘 수 있는 곳은 사방에 널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끌벅적했던 교내도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거든요. 수업을 모두 끝마친 학교는, 어느새 집으로 변신해서 저를 맞이해 주었습니다. 이불 한 채만 있으면, 어떤 장소라도 방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간혹 불청객이 찾아오기도 하고, 취객이 난동을 부리기도 했지만, 그런 소란 정도는 마땅히 감수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생활 내내 강의실, 학생회실, 실습 준비실 등을 전전하면서 최적의 수면 장소를 찾아다녔습니다. 어느 곳이던지 완벽한 프라이버시를 보장받을 수는 없었지만, 그런 것까지 애초부터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덕분에 특별히 볼 일이 생기지 않는 한, 학교 밖을 나갈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대학생활 내내 제게는 학교가 곧 집이고, 집이 곧 학교였으니까요.


지옥불이 끊는 옥탑방을 좋아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학생활 내내 순탄하게 학교 안에서 지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서 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군 제대 후 있었던 이야기만큼은 빠뜨릴 수 없을 것 같네요. 돌이켜 보면, 그때가 대학생활 최대 위기였습니다. 복학 후에, 돌아온 학교는 이전과 너무 달라져 있었습니다. 분위기 탓인지 몰라도, 예전처럼 자유롭게 교내에서 먹고 자기 힘들었습니다. 교내의 환경도 이전과 많이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입대 전에 익숙했던 얼굴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거든요. 복학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적응기간이 필요했습니다.


적응기간 동안, 아는 선배 집에 신세를 지기로 했습니다. 고맙게도 자취방에서 같이 지내자고 먼저 말을 꺼내 준 것은 선배 쪽이었습니다. 월세는 선배가 일체 부담하고, 저는 집안일을 하는 조건이었습니다. 저로서는 손해 볼 게 없는 거래였기 때문에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그 선배가 지내던 곳은 학교 인근에 있는 자취방이었습니다. 학교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던 그 방은, 5층 건물 주택 꼭대기에 있는 옥탑방이었습니다. 방은 작고 아담했지만, 화장실도 따로 있었고, 무엇보다도 옥상이 꽤 넓었습니다. 한 번도 옥탑방에 살아본 경험이 없던 저였지만, 보자마자 마음에 들더군요.

그 넓은 옥상을 마음껏 써도 된다는 말에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옥상에 서서 바라 본 주변 경관도 나쁘지 않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옥상에 누워서 바라보는 하늘은 정말 일품이었거든요. 낮에는 푸른 하늘이 가슴을 뻥 뚫리게 만들어 주었고, 밤에는 별들이 센티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하루 종일 햇빛이 내리쬐는 옥탑방 안 그 어디에도 곰팡이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선배가 그러더군요. 옥탑방에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곧 알게 될 거라고. 선배의 말에 의하면, 옥탑방은 사람이 살만한 곳이 못된다고 했습니다. 여름에는 엄청 덥고, 겨울에는 무지 추운 곳이라고 몸서리를 치더군요. 그 옥탑방에서 겨울은 지내보지 않아서 선배가 한 말의 진위여부를 모두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여름철의 옥탑방은 확실히 경험해 볼 수 있었습니다. 여름철의 옥탑방은 선배의 말처럼 찜질방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에어컨은 물론 선풍기 한대 없는 옥탑방에서 여름철 한낮의 열기를 고스란히 버틴다는 것은, 고행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라곤, 덥혀진 옥상 바닥에 물을 뿌리고, 입에 얼음 자갈을 물리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뜨거운 옥탑방에서도 나름 버틸만한 동기가 충분했습니다. 선배 혼자 학교에 가는 날이면, 옥탑방은 오롯이 저만의 공간으로 변신했으니까요. 잠시나마 제가 옥탑방의 주인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당장 지옥불이 끓어오른다고 해도, 옥탑방을 떠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착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같이 지냈던 선배는 정말 맘도 여리고 착한 사람이었지만, 결정적인 단점이 하나 있었거든요. 술주정이 정말 심했습니다. 그렇게 착한 선배가 술만 먹으면, 다른 사람으로 변신을 했습니다. 다중인격자가 되어서 할 소리, 못할 소리, 할 짓, 못할 짓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다른 것은 다 참을 수 있어도, 그것만큼은 참기 힘들더군요. 내 집 같이 편안했던 옥탑방이 불편한 공간으로 바뀌는 데는 채 두 달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선배가 거하게 취한 어느 날, 결국 버티지 못하고 옥탑방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당장 갈 곳도 없었지만, 그곳이 제가 머물 곳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잠시나마, 그 옥탑방을 제 집처럼 생각했던 것이 그나마 유일한 위안거리였습니다.


사무실이 집이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바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거든요. 맘 편하게 지내고 싶은 집은 고사하고, 방 한 칸이라도 마련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사무실과 방을 모두 구할 형편은 안되었던지라, 급한 대로 사무실 하나만 구했습니다. 잠은 사무실에서 자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처음 얼마간은 사무실 의자에 앉아서 잠을 잤습니다. 의자에서 한 번이라도 자보신 분들은 아마 아실 겁니다. 잠깐 눈을 붙이는 것이라면 몰라도, 오랫동안 숙면을 취하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 일인지 말입니다. 자다가 번번이 잠을 깨기가 일쑤라서, 결국에는 사무실 바닥 한편에 잠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운 좋게 군용 침대 하나를 구한 덕분이었죠. 확실히 이전보다 훨씬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습니다.


사무실은 낮에는 업무 공간으로 쓰이고, 밤에는 방으로 변신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활을 너무 오래 하다 보니, 몸이 버텨내질 못하더군요. 결국에는 사무실 인근에 작은 방을 하나 얻었습니다. 하지만 방을 얻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사업을 바로 접어야만 했습니다. 경험 부족에 과욕까지 부린 대가로 사업에 실패하고 말았거든요.


고시원이 제 집이 되었습니다


그 후, 한동안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을 다잡고, 정착한 곳이 강남 논현동에 있는 고시원이었습니다. 수많은 고시원 중에서, 그 고시원에 들어가게 된 건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의 아내가 살았던 동네가 바로 논현동이었거든요. 당시에 의지할 사람이라곤 아내밖에 없었습니다. 아픈 마음을 치유해줄 사람은 아내밖에 없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고시원에 방을 보러 간 첫날의 기억은,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기만 합니다. 머리 속에 한 번 각인된 그 방의 모습이 여전히 잊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방은 처음 보는 기괴한 구조의 방이었습니다. 생소하고, 낯설고, 신기한 방이었습니다.


제가 머물렀던 고시원 방의 구조는 이랬습니다. 효율적인 공간 구성을 위해서 문은 당연히 통로 쪽으로 열게 되어 있었습니다. 방 문을 열면, 바로 문 앞에 침대가 놓여 있었습니다. 침대가 놓여 있다는 표현보다는, 가로막고 있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그 방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단 침대 위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침대 아래쪽에는 싸구려 일인용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언뜻 보면 책상이 꼭 침대 위에 얹혀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왜 침대를 이렇게 배치했을까? 의문은 금세 풀렸습니다. 책상의 오른쪽에 서랍장이 붙어 있어서, 다른 배치는 아예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너무 오랫동안 방안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고시원 총무가 원한다면 책상을 빼줄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아마 제가 방안의 배치를 마음에 안 들었다고 착각했던 것 같았습니다. 제가 대답을 머뭇거리자, 이번에는 원한다면 침대도 빼줄 수 있다고 합니다.

“아니, 괜찮습니다. 그런데 책상을 사용하려면 침대에 앉아야 하는 건가요?”

“원한다면, 침대를 빼고 의자를 줄 수도 있어요.”

침대와 의자 중에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총무의 대답에 둘 중에 어떤 게 더 나은 선택인지 상상을 한번 해보았습니다. 침대와 책상이 있는 방, 책상과 의자가 있는 방, 침대만 있는 방, 아무것도 없는 방. 왠지 침대와 책상 모두 포기하면 안 될 것 같더군요. 그 공간은 침대와 책상과 방이 한 몸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냥 이대로 쓰겠습니다.”


작고 초라해도 나만의 공간이었습니다


계약을 마치자마자, 방에 들어와서 침대에 누워봤습니다. 침대에 누으니까, 다리의 대부분이 자동적으로 책상 아래 가려지더군요. 지진이 나서 당장 천장이 무너져도, 다리는 다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천장 쪽을 제외한다면, 그 방안에 있는 유일한 잉여 공간은 침대 옆 바로 오른쪽에 있는 공간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이 한 명 정도 바듯이 누을 수 있는 그 공간이 그 방의 유일한 사치였습니다.


낯선 방이었지만, 그 공간에 적응하는 데는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습니다. 방이 아무리 작아도 맘 편히 누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으니까요. 오랫동안 내 집 없이 떠돌아다니던 과객에게는 그 마저도 과분한 공간이었습니다.


제가 있던 그 방에는 창문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처음 며칠간은 방 안에 창문이 없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우연히 창문이 있는 다른 방을 보게 되면서, 제 방에는 창문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창문이 있는 방도 몇 개 되지 않았지만, 창문 있는 방은 가격이 더 비쌌습니다. 창문 하나의 대가 치고는 너무 비싼 가격이더군요. 창문이 있는 방에 들어가기 위해 많은 사람이 대기 중이라는 걸 알고 나서부터는, 창문 방은 깨끗이 단념했습니다.

대신 방 한쪽 벽면에, 시원한 바다가 보이는 창문 그림 하나를 붙여 놓았습니다. 바다 바람이 너무 부는 날에는, 아름다운 도시의 야경이 보이는 창문으로 바꾸어 걸었습니다. 때로는 나무들이 가득한 창문으로 변신하고, 때로는 제주도의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창문으로 바뀌기도 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창문이던지 변신할 수 있는 마법이 생긴 것 같았습니다.


그 방을 지금 다시 마주하게 된다면, 어떻게 이런 방에서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창문 하나 없는 그 좁은 방에서 어떻게 그 많은 시간을 버텨냈는지 의아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저에게는 그 자그마한 공간이 유일한 보금자리였습니다. 언제든지 누워서 발을 뻗을 수도 있었고, 아무 때나 마음 편히 잠을 잘 수 있었고, 원하는 만큼 책을 읽을 수 있었고, 마음껏 공상을 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방은 오롯이 저를 위해 존재했던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의 소중한 공간을 갖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세상을 살아 가는데 많은 공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많은 짐이 필요하지는 않다는 것도 일깨워 주었습니다.


아내가 치열했던 제 거주의 흑역사를 위로합니다


“많이 힘들었겠다.”


개복숭아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봄날 오후. 숨 쉴 때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향기가 사방에 가득한 날.

그 아련한 꽃향기에 아내의 진심 어린 위로가 함께 뒤섞이는 순간. 온몸에 퍼져가는 아련함이 갑자기 싹 사라지고 맙니다. 느닷없는 아내의 위로에 또 한 번 마음이 아득해집니다.


“그럭저럭 버틸만했어.”


이것이, 치열했던 제 거주의 흑역사에 대한 저의 답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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