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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귤 May 17. 2022

도서관 간식

얼마 전, 우리 집 어린이와 종종 들르는 도서관 앞에 아이스크림 할인점이 생겼다. 우리집에서 도서관까지는 어른 걸음으로 10분 조금 넘게 걸리는 정도. 어린이는 킥보드를 태워서 같이 가면 금방 도착한다. 약 2주일에 한 번, 일요일 오전에 지난 번 빌린 책들을 챙겨서 도서관에 들르는 것이 우리의 주말 루틴 중 하나였는데 그 루틴에 한 가지 할 일이 추가되었다. 아이스크림 할인점에 들러서 간식거리를 사는 것이다. 


지난 번에 처음으로 그 가게에 들러보았다. 4차선 도로의 횡단보도를 한 번 건너야 해서 약간 번거롭기는 하지만, 어쩌면 그렇게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온갖 간식을 샅샅이 골라서 갖다 놓았는지 둘러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날 정도로 뭐가 많은 그 가게에 들르는 것이 어른인 내게도 나름대로 재미난 일이다. 


어린이는 책을 고를 때보다 상당히 더 강력한 집중력을 발휘해서  자기 몫의 간식을 세 개 골랐다. 하나는 포도맛 아이스크림, 하나는 천하장사 소세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음날 먹겠다는 초코송이 과자 한 통. 덩달아 나도 요구르트맛 캬라멜인지 젤리인지 약간 정체성이 모호한 간식을 하나 챙겼다. 


가게 안에는 먹을 곳이 없지만 바로 옆에 벤치가 몇 개 놓인 작은 공원이 있다. 어린이와 나는 공원 벤치를 하나 차지하고 앉아서 반짝반짝 빛나는 햇볕과 한적한 도로와 아직은 물이 나오지 않는 바닥 분수를 바라보면서 간식을 먹었다. 어린이는 빨리 더 더워져서 바닥 분수가 나오면 좋겠다고 말했고, 아무래도 눈병이 무서운 나는 분수에서 물이 나와도 들어가는 건 안했으면 좋겠다고 굳이 잔소리를 덧붙였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르겠는데 커다란 말벌이 나타나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벤치에 앉아서 먹고 논 시간이 더 길었다. 


내가 어릴 때 다녔던 도서관은 집에서 마을버스로 너덧 정거장 떨어진 시립 도서관이었다. 80년대 치고는 그럴듯하게 꾸며진 아동 열람실이 있었다. 학교에도 도서실이 있긴 했지만 규모도 작고 대출이 안되어 나는 마을버스를 타거나 가끔은 걸어서 그 도서관까지 다녔다. 3학년이나 4학년 정도 되었을 무렵부터 다니기 시작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거길 열심히 다녔다. 


어려서는 아동 열람실에 다녔지만 자라서는 일반 열람실에 자주 다녔다. 공부한다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맡아놓고선 추리소설이나 로맨스 소설을 빌려서 자리에서 읽을 때가 사실은 더 많았다. 친구를 만나면 근처 분식점이나 편의점에 가기도 했지만 혼자 놀러가는 경우도 많았다. 실컷 책을 읽다가 슬슬 집에 갈 시간이 되면 출출해질 때가 있었다. 집까지 가려면 20분 정도는 가야 한다. 그러면 도서관 지하에 있는 매점에 내려갔다. 


매점에서는 우유나 초코파이 같은 빵도 팔았지만 바로 옆에 붙은 식당에서 쓸 수 있는 식권을 팔았다. 메뉴가 몇 가지 있었을 텐데 몇 번인가 거기서 식권을 사서 우동을 사먹었던 기억이다. 매점에서 얼마를 내면 가느다란 궁서체로 '우 동' 이라고 인쇄되어 있는 작은 회수권 같은 종이 조각을 주었는데, 식당 입구에서 그 종이 조각을 내면  소위 휴게소 우동이라고 하는, 유부 몇 조각과 쑥갓 같은 것이 들어간 국수가 나왔다. 


가끔은 컵라면을 먹기도 했다. 도서관 식당 한쪽에 커피 자판기보다 조금 더 큰 컵라면 자판기가 있었다.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쪼글쪼글한 비닐 커버에 한 겹 덧씌워진 컵라면 뚜껑에 끓는 물이 부어져서 등장했다. 뚜껑에는 뜨거운 물을 주입하는 대롱이 쿡 찌른 것 같은 구멍이 하나 뚫린 채였다. 그 부분을 책이나 지갑으로 잘 막아서 데워 먹어야 했는데, 생각보다 제대로 익어 나왔던 것 같다. 


국물이 너무 뜨거우면 식기를 기다리면서 대출한 책을 한두 장 넘겨보다가 국수 먹는 건 까맣게 잊어버리고 책에 푹 빠졌던 기억도 난다. 조명은 어둑하고 스텐레스 재질의 길다린 식탁과 등받이도 없는 벤치가 전부인 그 도서관 식당에서 참 잘도 읽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노안용 안경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 심각하게 의심스러운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옛날의 이야기다. 


내가 대학에 올라간 후 이사를 하면서 더 이상 그 도서관에 다니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 때 추억을 생각하면서 이후에도 몇 번 더 그 도서관에 가 보았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 도서관 건물도 낡았고 어쩔 수 없이 개수 공사를 하게 됐던 모양이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어귀부터 우동 국물 냄새가 들끓던 그 식당도 모습이 많이 바뀐 것 같았다. 최근 십 몇 년 동안에는 가 볼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코로나 사태 이후로는 식당 자체가 문을 닫지 않았을까 싶다. 


요즘도 종종 도서관 열람실에서 사람들 손때가 많이 탄 책을 보면 문득 그 도서관 기억이 날 때가 있다. 열람실의 서가나 갈색 나무 의자가 떠오를 때도 있지만 식당의 국수 냄새가 제일 먼저 다가올 때가 많다. 반대로, 어쩌다 고속도로 휴게소 같은 곳에서 국수를 시켜 먹자면 그 때 그 도서관 식당이 생각나기도 한다. 우리 집 어린이는 훗날 도서관을 떠올릴 때 아이스크림과 어육 소세지와 초코송이를 떠올리게 될까?


그러고보니 그 벤치에서 어린이는 비밀을 하나 알려주기도 했다. 봄에 애벌레를 만나고 싶으면 얇고 연한 이파리를 잘 찾아보면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애벌레들은 두껍고 질긴 이파리를 싫어하기 때문이지요! 하고 보라색 아이스크림 물이 든 입술로 어린이는 아주 힘 주어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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