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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귤 May 23. 2022

자판기 커피

커피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너무 많다. 한두 편에 정리해서 쓰려면 엄두가 안 나서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쓸 수 밖에 없는데, 대체 왜 이렇게 할 이야기가 많은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일단 커피를 거의 매일 마시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커피를 자주 마시니까 커피가 포함된 기억이 자연스레 늘어나고 커피를 둘러싼 추억이 많아지게 되면서 생활처럼 커피를 더 자주 마시게 되는 식이다.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커피의 굴레 같은 것이 만들어져 버렸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이 커피의 굴레가 시작되었나? 한 층 한 층 커피를 둘러싼 기억의 지층을 파들어가 보면 제일 아랫단에서는 역시 자판기 커피가 발굴된다. 사실 그보다 더 아래에 집에서 엄마가 타서 드시던 믹스 커피를 얻어 마시던 기억이 숨어 있긴 하지만 자발적으로 사서 마셨던 커피는 아니었으니까 일단 예외 처리. 진짜로 커피를 사서 마시기 시작한 것은 대학에 들어간 이후 학교 여기저기 설치되어 있던 자판기에서 100원을 넣고 뽑아 마시던 '밀크 커피'가 처음이었다.


그렇게 생긴 커피 자판기가 아직도 2022년 현재 대한민국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까? 관공서 건물에 한결같이 칠해져 있던 베이지색 겉면에 버튼이 위아래로 나란히 붙어 있었고, 성인이면 허리를 굽혀야 하는 정도 높이에 약간 투명한 플라스틱 문이 하나 붙어 있었다. '밀크 커피' '블랙 커피' '코코아' 정도가 언제나 그 자판기의 몇 개 안되는 버튼을 차지하는 메뉴들이었고, 제일 아래에 '밀크' 아니면 가끔 가다가 '스프' 같은 메뉴가 변칙적으로 들어가 있었다. 버튼을 누르면 종이컵에 가루가 담겨 먼저 내려오고, 빨간 불이 들어오면서 뜨거운 물이 부어진다. 불이 꺼지면 이제 컵을 꺼내도 된다는 신호다. 플라스틱 문을 열고 조심히 종이컵을 꺼내면 된다. 


밀크 커피는 당연히 커피 프림이 들어간 인스턴트 커피의 기본형. 블랙 커피는 프림도 설탕도 빠진 커피. 아, 그러고보니 이름은 가물거리지만 커피 가루에 설탕만 들어간 커피도 있었다. '밀크'는 프림에 뜨거운 물만 부어서 내놓던 것 아니었을까? 내겐 마셔 본 기억이 없지만 유달리 그 '밀크' 메뉴를 좋아하는 친구가 간혹 가다 있었던 것 같다. 대신 나는 드물게 자판기에서 보이던 '스프' 메뉴를 좋아해서 그 메뉴가 보이면 자주 눌러서 먹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그 당시 학생회 예산을 위해 운영하던 자판기는 전체 100원으로 통일되어 있어서 가벼운 학생 주머니로도 친구들 몫까지 사줄 만 한 가격이었다. 점심이나 저녁을 먹고, 아니면 친구와 잡담하고 싶은데 맨입으로는 왠지 서운하니까, 그냥 조금 졸려서, 도서관에 있다가 바람 쐬고 싶어서, 여러 이유로 건물 일층 로비 정도에 설치되어 있던 자판기 커피를 한 잔 뽑아서 적당히 친구와 혹은 혼자 건들거리며, 가끔은 책이라도 넘겨보면서, 가끔은 산책하면서 커피를 마셨다. 


처음에는 당연히 밀크 커피를 마셨지만 학년이 올라가면서 나는 블랙 커피나 설탕 커피를 종종 마셨다. 스타벅스 같은 커피 전문점이 빠르게 퍼져나가고 인공 헤이즐넛 향을 넣은 싸구려 이외 제대로 된 원두를 다루는 개인 카페들에 가보게 되면서는 자판기 커피가 커피가 아닌 다른 음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특유의 맛이 필요할 때가 있기는 했지만 회사에 들어가니 어차피 같은 지향점을 지닌 맥심 커피가 무한 제공되고 있어 굳이 자판기를 찾을 일이 생기지 않았다.


졸업한 학교에도 몇 차례 가 보았지만 커피 자판기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체 로비 한가운데에 놓인 그 자판기에 어디에서 공급해온 물로 그 자판기 커피를 끓였을지, 자판기 안이라고는 하지만 공기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을 그 커피와 설탕과 프림 분말 안에 혹시 벌레 같은 것이 들어가지는 않았을지 매우 의심스럽다. 어쨌든 자판기 커피 때문에 배탈이 나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지금 다시 마시라고 하면 과연 어떨까? 당시에 멀쩡했던 건 20대의 위장이 지금 내 것보다 훨씬 튼튼했기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20대의 그 무렵에는 대화하는 기술도 서툴고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조절하기에도 서툴었다. 입시 때문에 유예했던, 성인으로 진입하는 시기를 통과하면서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해버리는 바람에 혹은 걸지 않아도 될 전화를 거는 바람에 수많은 이불킥의 순간을 넘겼다. 그나마 커피가 있었던 덕분에 대화 사이사이 넣어야 하는 입 다물고 듣는 시간을 겨우 끼워넣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를 위로해야 할 때 혹은 내가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기분에 취해야 할 때도 커피가 큰 역할을 했다. 


그런 여러 가지 역할을 했던 커피를 겨우 100원으로 한 잔 뽑을 수 있었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참 고마운 일이다. 그 때 그 커피를 지금 마시라면 사양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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