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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Jul 03. 2024

놀이터와 버스의 메모장

내가 폰에 집중할 때가 웹툰 볼 때만은 아니라는!



 7살 난 딸아이 여름과 나는 아파트 놀이터의 고인물이다. 걸음마를 시작한 때부터 7살 생일이 지난 지금까지 단지 안에 있는 세 놀이터를 두루 돌아다니고 있다. 오후 4시에 시작하는 놀이터 시간은 겨울철에는 6시, 여름철에는 7시가 넘도록 끝나지 않는다. 맑은 날에는 덥든 춥든 미끄럼틀에 출근 도장을 찍고, 비가 내리면 비옷과 장화를 차려입고 참방참방 걸어 다닌다. 내가 자주 듣는 인사로는 '오늘도 있네요. 언제 들어가요? 아직 있어요?'가 있고, 아주 가끔 '어제는 없더라?'가 있다. 평일과 주말, 특별한 일이 없는 오후라면 우리는 놀이터에 있다. 여름이 미끄럼틀에 올라가고 친구와 상황극을 이어가는 동안 나는 간식과 커피, 때로는 햄버거나 빵을 먹으며 벤치에 앉아 있다. 낯선 친구와도 곧잘 노는 여름을 지켜보며 내 친구가 없을 때도 있지만 괜찮다. 가방에는 책이 있고 작은 스케치북과 펜도 있고, 휴대폰 배터리도 넉넉하다.


 날씨와 보호자의 일정에 상관없이 놀이터에 머무르기는 물론 여름의 결정을 따른 선택이지만, 내 의지에 완전히 반하는 일은 아니다. 집에 들어가면 내가 온통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상황이 매일 같이 이어지고, 내 한 몸 편해지려고 하면 텔레비전을 틀어주어야 하니까, 차선책 중에는 최선의 해결책이라 여기고 바깥 놀이의 수행비서가 되기를 자처했다. 아기 때부터 실컷 돌아다니고 뛰어다니면 운동을 잘하지 않을까 기대도 했고, 피곤해야 목욕하고 일찍 자니까.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집 밖의 나는 집안의 나처럼 사납고 신경질적이지 않으니까, 아무 할 일이 없고 날씨가 궂어도 웬만하면 집에 바로 들어가지 않았다.

놀이터의 여름

 아이와 소통이 잘 안되던 어린이집 시절에는 하원 시간 4시가 다가오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녁과 밤까지 어떻게든 큰 울음과 고함 없이 버티고 싶은 미션 임파서블의 목표를 놓지 못했다. 아이가 좀 울고 엄마는 버럭버럭할 수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자괴감이 들었다. 괴로운 마음을 피하고 싶어 어린이집을 마친 여름을 모시고 '여기로 갈까요? 이거 좀 드실래요?' 하는 하녀가 되었다. 화요일에는 시장에 가고 다른 날에는 늘 놀이터에 갔다. 아파트 놀이터에 질린 아이를 위해 동네에 걸어서 갈 수 있는 놀이터는 빠짐없이 찾아다녔다. 특히 자주 간 곳은 어른 팔뚝만 한 비단잉어들이 사는 연못이었다. 세 군데 놀이터를 돌아도 아이 친구와 내 친구가 하나 없는 날 미는 자전거에 뻥튀기 과자를 싣고 찾아가는 곳. 시간 맞춰 분수가 나오고 여름이면 아이리스가 풍성하게 피는 연못은 조경이 훌륭한 길 건너 아파트 단지에 있었다.


 여름이 잉어들에게 과자 부스러기를 던지는 동안, 아이가 물에 빠지지 않도록 곁눈질을 해가며 메모장에 일기를 쓰곤 했다. 잉어 구경에 푹 빠졌던 4살과 5살 시절에 마침 일기를 함께 쓰는 시절 일기 카톡방에 속해 있었는데, 일기를 여러 번 빼먹으면 쫓겨나는 시스템 덕분에 매일 메모장에 뭐라도 써야 했다. 그때 쓴 일기들에는 후렴처럼 반복되는 구절이 있다. “아직 놀이터, 언제 집에 갈 거니?” 사정이 이렇다 보니 놀이터에서 글쓰기를 시작한 건 당연하다. 누구보다 늦게까지 놀다 들어와서 상쾌하게 씻고 정답게 저녁밥을 먹는다면 아주 아름다운 일상이겠으나, 여름도 나도 피곤하면 거침없이 짜증을 발산하는 성격이라 해 질 녘에는 꼭 고성과 눈물을 주고받아야 하루가 마무리되곤 했다. 9시도 안 되어 곯아떨어진 아이를 그제야 꿀 떨어지는 눈망울로 그윽하게 바라보다가 낮에 쓰던 메모를 열어 일기를 마무리 짓곤 했다.


 놀이터에서 글감을 찾는 일이 적성에 잘 맞았다. 어릴 때부터 아주 조용한 환경에서 오히려 집중하지 못하던 습관이 변하지 않았다. 일기만이 아니라 글방과 모임 과제도 놀이터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떠오르는 대로 끊어서 쓰는 습관은 산만하면서도 곧잘 집중하는, 거기다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사람에게 딱 맞았다. 아무거나 떠오르는 글감은 몽땅 메모장에 썼다. 메모장에는 이미 글이  조각들과 글이 될 법한 문장들과 가망 없는 상념들이 모여있다. 연초 ‘자주 떠오르는 기억을 모조리 기록하자.’라는 다짐만은 잘 지키고 있어서, 쓰임과 가치와 상관없이 글을 많이 쓰고는 있다. 아이 덕분은 아니지만 놀이터 덕택일 수도 있겠다. 놀이터 고인물 생활 5년 차가 된 요즘은 수다 떨 친구가 하나 이상 꼭 있어서, 메모장 여는 횟수가 많이 줄었고 쓰기 시작해도 곧잘 흐름이 끊기지만 여전히 글의 시작은 바깥이다.

 메모장을 여는 또 다른 장소는 시내버스. 차를 탈 때마다 빌려 쓰는 기분을 상기시키는 남편 덕분에 자주 타게 된 버스이지만, 적응하다 보니 제법 시간을 유용하게 쓸 줄 알게 되었달까.

역 앞에 있는 동네에 가려고 타는 버스는 놀이터와는 사정이 사뭇 다르다. 기사님의 난폭운전에도 불구하고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어쩐지 집중력과 기억력을 끌어올려 준다. 아이일 때부터 버스를 타고 공상하던 버릇이 사라지지 않아서 이런저런 이야깃거리가 어렵지 않게 떠오른다. 곁에 여름이 없고 놀이터 친구도 없으니, 생각이 사라지기 전에 바로 쓰기 시작할 수 있다. 때때로 멀미가 나면 먼 산을 보며 쉬지만 30분은 생각과 기억의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무언가를 붙들어 둘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운전할 때보다 두 배 가까이 걸리는 한 시간의 이동 시간이 글쓰기를 위한 시간이 되고, 알뜰살뜰 아낀 시간에 갈겨쓴 메모 조각을 안고 걷는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장마와 더위로 지치고, 하반기로 접어들었다는 조바심에 불안감이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7월이지만 이렇게 버텨본다. 뭐라도 쓰고 읽고, 분노하고 깔깔 웃으며 버틴다. 이제야 꺼낸 좋아하는 꽃무늬 여름 이불을 덮고 자야겠다. 내일도 바깥은 덥고 지치겠지만, 그렇다고 나가지 않을 수야 없지. 불볕더위 전에 여름과 잉어를 한 번 보러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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