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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Jun 26. 2024

이 배가 너의 배이더냐?

자꾸 나가는 이유 중 하나라면 남편



 신혼 때 시가에 가면 둥그렇게 둘러앉아 과일을 먹는 시간마다 돌림노래처럼 반복되는 화제가 있었다. 주제는 다이어트.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남편의 다이어트. 더욱 자세히 말하자면 그의 툭 튀어나온 뱃살을 빼는 문제. 시부모님과 시할머니, 때로는 시누이와 시고모와 시삼촌까지 ‘뱃살 토론’의 열렬한 참가자가 되었다. 마흔이 넘은 지금의 나라면 그런 말들이 길어지지 못하게 끊을 수 있겠지만, 그때 나는 그저 새아가였다. ‘저녁 6시 이후에 먹지 마라, 알토란에 나온 무슨 무슨 주스를 아침마다 갈아 마셔라, 헬스장에 등록해라, 헬스장 등록비를 내주랴? 살을 빼면 옷을 사주겠다. 밥을 너무 잘 챙겨 먹이는 것 아니냐. 배만 빼면 얼마나 인물이 좋으냐. 저 배만 들어가면 얼마나 보기 좋으랴. 20대까지만 해도 몸짱이었는데.’ 본인 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남편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자리를 피하거나 알아서 한다는 미적지근한 대답에 애가 탄 어른들은 새아가인 나를 붙잡고 신신당부했다. ‘제발 오빠 뱃살 좀 빼게 도와주라.’라는 애절한 부탁에 나는 ‘네. 노력할게요.’ 했다. 실제로 여러 차례 노력했고, 실패했다. 남편의 다이어트 문제로 우리 부부는 눈물 콧물을 쏟으며 싸웠다. 나는 노력하지 않는 남편에게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상처를 주었고, 남편은 식생활에 간섭하고 잔소리하는 나에게 학을 뗐다.


 새집으로 이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봄이었다. 시어른들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이 넘실대던 며느라기 시절이라 그랬는지, 어느 날 나는 엄마와 시어머니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양가 어른들과 영덕 바닷가로 나들이를 계획했다. 외식을 즐기지 않는 시아버지의 최애 외식 메뉴인 물회를 먹고 바닷바람을 쐬고 돌아오기로 했다. 찬바람이 분위기 있게 불던 그 토요일, 횟집 창가 단체석에는 양가 부모님들과 남편과 내가 단란하게 둘러앉아 모둠회와 물회를 맛있게 먹으며 환담하였다. 얼토당토않은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 말이다. 남편은 이 집에서 회를 포장해 가서 저녁에 집으로 친한 형님들을 초대할 계획이었는데, 시아버지는 우리가 당연히 청송 시골집에 같이 갈 거로 생각하신 게 문제였다. 다 같이 청송집에 가서 저녁으로 마당에서 삼겹살을 굽고 사돈과 아들 내외와 즐거운 저녁을 보낼 줄 알았는데, 아들이 저녁 약속이 있다고 하니 언짢아진 거였다. 엄마 아빠도 아버님 뜻을 따르고 싶어 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맨날천날 백날천날 만나는 그 형님들, 집들이 때 왔으면 되었지 왜 또 부른다는 것인지. 상냥하고 친절한 모습으로 지내야 한다면 형님들보다 어르신들과 있고 싶었다. 엄마들이 민망할 정도로 부탁해 보았지만 소용없었고, 내가 남편에게 카톡으로 설득의 메시지도 보내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편은 선약이니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반복했고, 시아버지는 심기 불편함을 숨기지 않았다. 엄마들과 며느리는 좌불안석이었지만 어정쩡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치고 헤어졌다. 괜히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시키지도 않은 모임을 주최한 나 자신이 우스웠다. (이날 이후로 다시는 이런 만남을 주선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봄날답지 않게 장대비가 쏟아졌다. 며느리인 나는 속상한 채 헤어진 어른들의 표정이 아른거려 마음이 불편했지만, 당사자는 야무지게 포장해 온 회를 형님들과 나누어 먹을 저녁 시간을 기다리며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빗길을 달리는 중 먼저 청송에 도착한 어머님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 '기승전 살 빼라' 말씀을 며느리에게 전했다. 못해도 서른 번은 들었을 그 말, 살 빼라. 오빠 살 빼게 만들어라.였다. 아들이 본인 약속을 중시한 것일 뿐인데, 몹시 열받으신 모양.

"아빠가 엄청나게 걱정하시더라. 오빠 배가 그 모양이어서는 안 된다고. 어째 니가 좀 달래서 병원을 데려가든지 뭔 수를 좀 내봐라."

서운하면 서운하다고 하면 될 텐데, 그리고 어떤 말이든 본인에게 직접 하면 될 텐데. 그저 '네, 네' 하는 며느리에게 모든 불만과 하소연이 낙수효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날 밤, 우리 집에는 남편이 끔찍이도 아끼는 두 형님이 와서 먼 길 달려온 회와 소주를 맛나게 먹었다. 술기운이 오른 큰 형님이 밑도 끝도 없이 남편 칭찬(제수씨 어쩌고저쩌고, 아무튼 우리 동생이 참말로 착하단다.)을 했고 나는 몹시 지루해져서 연거푸 소맥을 마셨다. 형님들이 집에 돌아가고 낮에 들은 시어머니의 당부를 남편에게 전했다. 여러 마디 말을 보태지도 않았는데 이미 오래 다이어트 잔소리를 들어온 남편이 버럭 큰소리를 냈다. 나야말로 결혼 준비 때부터 임신과 남편 체중 감량을 책임지라는 소리를 질리도록 들어왔는데, 낮에도 남편 가족 눈치 보랴, 밤에는 남편 친구 비위 맞추랴, 전부 제 맘대로 한 주제에 나에게 화를 내?


 벌써 몇 번이나 주고받아 질릴 대로 질린 말싸움이 이어졌다.

"그러면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 차라리 나한테 살을 빼라고 하면 빼겠다! 근데 당신은 하라는 대로 절대 안 하지, 어머님 아버님은 나 볼 때마다 밥을 주지 마라. 차 키를 뺏으라 하시지!. 뭘 어떻게 하라고!!"

"야! 그러면 니가 엄마한테 직접 말하든지!"

"말하라면 못할 줄 알아?"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안방 침대에 걸터앉아 전화를 걸었다. "어머님!" 하는 목소리에 남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보면서 용기를 냈다. “도저히 못 하겠어요. 건강 걱정되어서 살을 빼라고 해도 말을 듣지를 않고 매번 화를 내고 오늘도 소리를 지르네요. 더는 말도 못 꺼내겠고, 힘들어 죽겠어요.” 말이 술술 나왔다.

며느리의 눈물 어린 호소에 시어머니는 당황했다.

"아이고, 그래. 싸웠나. 오빠야가 많이 화내더나. 엄마가 이야기할게. 자꾸 울지 말고, 그래. 속상해하지 말고, 그래그래. 울지마라."

시어머니가 다정하게 달래주자, 서러움이 터져버린 나는 전화기를 붙들고 꺼이꺼이 울었다. 그 와중에도 술을 많이 먹었느냐는 어머님의 질문에 "아니요! 저는 별로 안 마셨어요!" 하고 선을 그었는데, 기억이 이리 선명한 걸 보면 그다지 취하지 않았던 게 맞았나 보다. 어머님은 다시는 살 빼란 말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 남편이 잘못하면 혼 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어머님 집 앞

 남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나를 지켜보다가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나는 양치질을 하고 바로 잠들었다. 엉엉 울고 나면 꿀잠 자는 법이니까. 다음 날 아침에 개운하게 일어났더니 어머님에게 장문의 카톡이 와 있었다. 밤새 걱정되어서 한숨도 못 잤다고, 자기 몸이고 어른인데 옆에서 잔소리하지 말자고, 본인이 깨달아야 하는 거라고, 걱정하지 말자는 내용이었다. 걱정하게 해드려 죄송하다고 답장을 보냈다. 벌써 8년도 전의 일이다. 남편이 다이어트를 했을까? 그럴 리가 있겠는가? 시부모님이 잔소리를 그만두셨는가? 그만두지는 않았지만, 훨씬 줄어들었다. 중요한 건 며느리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는 거지. 나는 결혼식 이후 1킬로도 찌지 않았으니까, 남편의 체중과 식생활은 순전히 본인 책임이라는 걸 모두가 알았으니까. 무엇보다도 그 어떤 걱정이든, 그것이 건강과 질병에 관련된 중대한 사안이라 하더라도 본인의 뜻 없이는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해두자. 그리고 배 나온 사람한테 자꾸 배 나왔다고 뭐라고 하는 일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모두 기분이 나빠질 뿐이다.


 며칠 전 시골에 갔다가 새벽 일찍 남편이 사과밭에 일을 다녀왔다. 시어머니가 신으라고 챙겨준 장화를 덥다고 신지 않더니 양쪽 발목부터 정강이에 수십 방 모기에게 물렸다. 상처를 긁었더니 진물이 나고 벌겋게 부어올라 한눈에 보기에도 걱정스러운 사태. 내일 반드시 병원에 가라고 했더니 바로 가겠다는 대답 대신 또 짜증 섞인 역정을 내서 혼자 맥주 한 캔 마시며 씩씩대는데, 시어머니의 걱정 가득한 카톡이 왔다. 바로 답장했다.

ㅡ병원 가라고 하니 언성을 높이고 화를 내서 뭐라고 못하겠네요.

ㅡ그래. 내가 연락할게.

다음날 남편에게 묻는 대신 어머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ㅡ병원 간다고 하던가요?

ㅡ알겠다던데 ㅋ

남편은 병원에 가서 항생제 주사를 맞고 약을 받아왔다. 다리는 아직도 시뻘겋지만 나아지고 있다. 너 하나 때문에 몇 사람이 걱정하며, 몇 사람이 신경 쓰고 연락을 주고 받는지 모르니?

아직도 그런 게 민폐인 줄, 미안한 줄 모르는 이 답답한 친구야. 네 몸 좀 챙겨라.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정말 힘이 드는구나. 제발 간식 좀 작작 먹고, 운동 좀 하고…. 아이고, 말을 말자 말아. 부디 제 몸을 좀 보살피려무나.

남편이 집에 있을 때 꼭 밖에 나가고 싶은 이유 중 하나로 이런 이야기하면 누가 이해해 주려나? 쳐다보고 있으면 걱정스러워서 덜 보고 싶은 내 마음 누가 알아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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