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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May 03. 2024

캠핑 말고 소풍

바깥 놀이는 좋지만 캠핑은 별로


 아이 친구들은 어째서 그렇게도 캠핑을 많이 다니는가? 어찌 그리 부지런하단 말인가? 유치원생 아이는 작년부터 캠핑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엄마, 우리는 텐트가 없어? 엄마, 우리도 캠핑 가자! 엄마, 친구는 캠핑카에서 자고 왔대. 엄마, 엄마, 캠핑, 캠핑…!

나중에 가자, 나중에. 대답하기에도 지치는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캠핑은 정말이지 가기 싫다. 멀리 떠나는 여행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숙박 포함 여행을 떠나야 한다면 숙소는 펜션이나 호텔이지, 캠핑은 내 여행 옵션에 끼어들 수가 없다. 아이를 위해 글램핑 정도 한 번 못 갈 건 아니지만…. 자는 내내 호흡마다 으르렁드르렁하는 남편과 가족 여행 별로 가고 싶지도 않고, 밖에서 잠들고 싶지도 않다.


 텐트에 얽힌 좋지 못한 추억이 세 번 있다. 초등 4학년 때 포항 해변에서 밤새 잠을 설친 기억, 중1 학교 수련회로 텐트를 치고 잤던 비 내리는 밤, 그해 여름 방학 안동에서 또 불편하게 잤던 기억. 꿉꿉하고 눅눅하고 모기 물리고, 등이 배기는 밤의 피로감이 생생하다. 요즘 캠핑 사이트 시설이 얼마나 좋으며 깨끗한지, 텐트와 캠핑 장비들의 눈부신 발전으로 캠핑이 얼마나 쾌적하고 재미나는지 아무리 들어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텐트가 집보다 튼튼하고 안전하고 편안할 수 있다는 말인지? 바깥바람 쏘이면서 숯불에 구워 먹는 고기와 술이 아무렴 맛있겠지. 이슬 촉촉한 새벽에 산을 보며 마시는 모닝커피는 특별히 향긋하겠지. 그래도 나는 고깃집에서 편히 구워 먹는 갈비가 좋고, 카페에서 내려주는 커피가 좋다.


 여러 번 썼듯이 나는 산골 출신이다. 별이 쏟아지는 하늘과 모닥불의 낭만을 모르지 않는다. 단지 그 낭만을 마당에서 즐기고 방에 들어가 편히 쉬기를 좋아한다. 남편과 내가 드물게 의견 일치를 보는 취향이다. 잠을 왜 한데서 잔단 말인가? 다행히 엄마네 집에도 시가에도 마당이 있고 밭이 있다. 텐트와 캠핑 노래를 부르는 아이를 위해 작은 원터치 텐트를 사서 사과밭에 펼쳐주는 노력 정도는 했다. 마시멜로를 꼭 구워 먹고 싶다기에 할머니집 마당에서 불을 켜고 구워 먹기도 했다. 그 정도로 캠핑의 낭만을 흉내 내면 나는 충분하다고, 차고 넘친다고 생각한다.

소풍날

 그렇지만 날 좋은 봄날, 아이와 갈 곳을 찾다 보면 캠핑할 수 있는 곳만큼 괜찮은 장소도 없다. 온 동네 놀이터 투어로 만족할 수 없는 아이와 너른 뜰과 나무 그늘이 있는 곳을 찾아 잠깐 떠난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그 친구가 마침 캠핑족이기에, 채소 구이와 김치볶음밥, 주먹밥과 김밥 같은 걸 챙겨서 친구네 차를 얻어 타고 가까운 곳으로 떠난다. 편도 1시간이 넘지 않는 거리에 폐교를 잘 가꾸어 놓은 장소가 있다. 넓은 잔디 운동장과 나이 많은 플라타너스가 있고 아이가 사랑하는 에어바운스가 있는 곳. 춥거나 더우면 놀기 힘들어서 날 맑은 한철 부지런히 가야 하는 곳이다.


 도착하자마자 입장권을 끊어 아이들 손목 팔찌를 채워주고 자리를 세팅한다. 나무 아래 벤치 옆에 텐트를 치고 파라솔을 테이블에 꽂는다. 푹신한 돗자리를 깔고 구석에 가방과 외투를 밀어 넣어 바람에 텐트가 들썩이지 않도록 한다. 캠핑 의자에 깊숙이 엉덩이를 붙이고 집에서 내려온 따끈한 커피를 따른다. 노란 파라솔과 파란 하늘과 연두색 플라타너스 이파리를 보면서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흔하지 않은 평온하고 잔잔한 기분으로 맞이하는 오전 11시. 늦봄이라 분수대 옆에 보라색 창포꽃이 피었다. 죽단화는 그새 시들었고 인동덩굴에 자주와 노란색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화장실에 간 김에 새빨간 양귀비가 핀 화단과 건물 뒤쪽 텃밭을 한 번 둘러보고, 자리에 앉아 나는 평소보다 덜 움직이는 피크닉을 시작한다. 돗자리와 보냉백을 챙겨든 무리들이 운동장 둘레에 저마다 자리를 잡고, 김밥과 간식 보따리를 양손에 든 우리 일행도 속속 도착한다.


 비슷비슷한 나이의 아이들과 80년대생 엄마들의 조합으로 동네 놀이터 분위기가 된다. 늘 노는 내 친구와 나는 어제 만나고 오늘 또 놀아도 재미나지만, 자라면서 놀이 취향이 많이 달라진 친구네 아들과 내 딸은 서로 심드렁해진 사이. 친구(경산댁)와 내(대구댁)가 편히 놀기 위해 사람을 모았다. 먼저 부산댁과 둥이들을 초대하고 울산댁과 자매를 불렀다. 울산댁이 친한 김천댁과 남매를 데려왔고, 플라잉 요가 선생님도 아침 수업을 마치고 유치원생 딸을 데리고 왔다. 동네 친구들은 밖에서 만나면 더욱 반가운 법, 엄마들도 아이들도 서로 반기며 잘 논다. 에어바운스에서 한 번 뛰고 나면 금세 친구가 되어버리는 아이들만큼은 아니지만, 오가며 인사만 나눈 사이라도 이런 날이면 엄마들끼리도 어렵지 않게 농담을 나누며 놀게 된다. 마침맞게 5월의 햇살이 반짝이고 산들바람도 부는 날씨까지. 좋은 날이다.

비눗방울 놀이하는 아이들 머리 위

 아이들이 엄마나 이모를 부를 때마다 입에 김밥이나 주먹밥을 하나씩 넣어준다. 뛰어놀다가 자리로 돌아올 때마다 ‘김밥 먹을래? 참외 먹을래? 사과 줄까? 안 먹어? 배 안 고파?’ 하다 보면 배가 불러진 아이들은 점점 어른들에게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막 유치원에 들어간 둘째들이 ‘엄마, 엄마! 이리 와 봐!’ 하지만 웬만해서는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는 것이 소풍의 핵심이다. 아니, 더 중요한 핵심은 엄마들 모두가 엉덩이가 무거운 사람이라는 점이다. 여러 명이 모여 놀 때 ‘스타일이 잘 맞다’라고 한다면 이런 포인트의 합이 잘 맞다는 뜻이다. ‘여기 나와서는 엄마에게 징징대지 않고 친구들끼리 놀도록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있어야 모두가 편할 수 있다. 아이들과 잘 놀아주는 활력 넘치고 다정한 엄마가 있다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지만, 앉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편치 않은 법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안한 마음이 고마운 마음을 넘어서고, 때로 죄책감과 부끄러움까지 들 수 있기 때문이다. ‘저 엄마는 저렇게나 다정하구나. 활짝 웃으며 놀아주네. 참 보기 좋다. 나는 왜 애한테 이렇게 냉랭할까. 우리 애 불쌍하다. 나도 불쌍하고…’ 이러면서 안 해도 될 자책에 공들이고 마는 것이다.


 이번 나들이를 마음 편히 즐겁게 한 건 엉덩이 무거운 엄마들이 모여서 우리끼리 하하 호호하는 시간이 길었던 덕분이다. 당연히 아이들이 아무도 다치지 않고, 크게 싸우거나 오열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지친 아이들이 잠들려고 할 때, 나는 아껴둔 기력을 꺼내서 퀴즈 놀이를 시작한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퀴즈는 2단계면 끝나고, 끝말잇기에는 고유명사와 동사가 난무하지만 까르르 웃으며 아이들이 잠들지 않는 것만이 목표. 친구와 헤어져 무사히 집에 도착하면 씻고 밥 먹는 순서로 잠시 실랑이하지만, 번개같이 씻기고 잘게 자른 불고기에 밥을 비벼서 텔레비전 앞에서 먹도록 하면 이제 거의 다 왔다. ‘개비의 매직하우스’ 테마송을 흥얼거리며 나도 샤워를 한다. 꽃가루와 먼지를 털어내고 나와서 도시락통을 설거지한다. 한 줄 남은 참치김치김밥 냄새를 킁킁 맡아보고 저녁으로 먹는다. 폰을 보다가 책을 보다가 산만하지만 편안한 시간.


 평소에도 늘 7천 보는 걷는 내가 소풍날 저녁에 확인한 걸음 수는 2985였다. 종일 김밥과 커피와 과자를 먹고 앉아 있다가 밤에는 방귀대장 뿡뿡이가 된 날, 코를 골며 곯아떨어진 아이를 흐뭇하게 보면서 다음 소풍을 계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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