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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Apr 24. 2024

산책이라면

별 볼일 없는 동네 산책을 좋아해요



 느긋한지 좀 되었는가. 실은 요즘 마음이 바쁘다. 아니 마음이 바쁜지 한참 되었는데, 이제 더는 여유로운 활동으로 달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분주해졌다. 커피 마시는 횟수를 조절하지 않고, 반주를 자주 마셨더니 속이 쓰려져서 어제부터 위장약을 먹고 있다. 오늘처럼 아무 일정이 없는 시원한 월요일이면 밖에 나가 걸어야 마땅한데, 집에서 영화를 두 개 보고 두 시간 넘게 낮잠을 잤다. 그래도 계획한 목차에 맞추어 써보려고 여는 산책 글.


 평소에 많이 걷지만, 제대로 산책하는 일은 쉽지 않다. 목적 없이 걷는 일이 시간 낭비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차로 갈 수 있다면 굳이 걷지 않는 삶이 당연한 작은 도시, 좁은 인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걸음이 빠르다. 천천히 걷는 사람들은 대부분 휴대폰 화면에 정신이 팔려있고 운동이 목적인 사람들은 풍경을 휙휙 지나쳐 시야에서 금세 사라진다. 식빵과 달걀, 반찬가게 봉지를 손에 든 내 걸음도 느긋하지 않다. 유치원 차가 오기 전에 어서 돌아가서 집안 살림 정리하고, 밥도 안치려면 성큼성큼 걸어야 한다. 특별히 의식하지 않아도 밖에 나가는 날이면 7천 보 정도 걷는다. 도서관 근처에 있는 번화가에 다녀오고, 아이를 따라다니며 놀이터에 서성대는 오후 시간까지 늘 걸어 다니니까. 바빠도 요가학원 가는 길 내리막에서 단풍나무를 들여다보며 사진 찍고, 건널목에서는 봄까치꽃을 들여다본다. 학교 담벼락을 따라 무성해지는 아이비와 자리공 덩굴(비슷하지만 확실하진 않은), 이팝나무 가로수를 관찰하며 하루하루 달라지는 봄날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그렇지만 이런 일상적 걷기는 산책이라 부르기에 충분치 못하다.

저녁 햇살

 산책을 나서겠다고 결심할 때마다 떠올리는 이미지는 드라마 섹스 앤드 더 시티(옛날 드라마라고 쓰려다 말았다. 20년이 넘었으니, 옛날이 맞지만, 아직도 나에게는 생생한걸)의 미란다이다. 마음이 복잡한 휴일이면 미란다는 데님 오버올과 점퍼 차림에 대충 모자를 뒤집어쓰고 번잡한 도시 거리로 나선다. 얽히고설킨 생각들을 털어내기 위해 발길 닿는 대로 여기저기 걸으며 길바닥에 고민을 털어놓고 홀가분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미란다의 산책이었다.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미모의 여인과 데이트 중인 전남친을 마주쳤던가? 별일 없이 홀가분하게 산책하고 집에 돌아가서 평온하게 일상이 이어졌다고 하면 드라마가 아니지. 아무튼 나는 미란다가 아니고 내 삶은 드라마가 아니지만, ‘자! 어디 한 번 나가볼까!’하는 날에는 미란다가 자꾸 떠오르는걸.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시야에 아파트와 공장이 들어오는 동네에서 나의 산책은 나무가 많은 길을 찾아 걷는 것이 목적이다. 고무바지와 운동화 차림에 모자를 쓰고, 티니핑 노래가 없는 플레이리스트를 골라 이어폰을 낀다. 휴대폰이 들어가는 조그만 크로스백을 메고 길 건너 아파트로 간다. 계단을 오르면 나오는 둘레 오솔길을 따라 걷는다. 키 큰 소나무와 모과나무, 벚나무 아래 흰 철쭉을 따라 걸으면 정문이다. 신호등 있는 건널목을 건너 언덕을 올라가면 이어지는 길에는 장터가 열리는 화요일 외에 걷는 사람이 별로 없어 한적하다. 시에서 조성하는 숲길이라 수종이 다양하고 돌길도 모양을 내 다듬어 놓았다. 아직 어린나무들 사이를 걸어 다시 큰길로 나오면 다음 번화가 앞까지 쭉 이어지는 공원이 나온다. 탁 트인 경치가 좋지만, 끝까지 걷기에는 나무 그늘이 없어서 조금 걷고 돌아온다. 늘 다음번에 더 걷겠다고 다짐하면서.


 돌아오는 길에는 숲길 옆에 있는 큰 아파트 단지의 산책로에 들어간다. 좁은 길에 나무가 많아서 언제나 그늘이 드리우는 곳이다. 오르막을 걷다가 구석에 놓인 흔들의자에 슬쩍 앉아 발을 달랑거리기도 하고 계단참에 잠깐 앉아 쉬기도 한다. 꽃나무와 열매 나무가 골고루 많이 심겨 있어 사철 구경거리가 많다. 이름표가 없는 꽃나무 사진을 찍어 이름을 찾고, 그리고 싶은 풀꽃 사진도 찍어 온다. 줄기가 붉고 잎이 커다란 말채나무의 새빨간 열매, 열매껍질이 핫핑크인 사철나무, 보라색 열매가 선명한 좀작살나무를 여기서 만났다. 둘러보면 우리 집 앞에도 흔한 나무들인데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걸으려고 마음먹고 나가서야 잘 보이는 작은 존재들이 있다.


 산책로의 나무 그늘이 끝나고 건널목을 건너면 다시 처음 걸었던 길 건너 아파트 정문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걸으면 정원이 아름다운 길을 걸을 수 있다. 그 길을 따라가면 산책 시간은 두 배로 길어지고 뙤약볕을 피할 수 없으니, 이쯤 걷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횡단보도를 건너 오솔길로 들어가지 않고 큰길을 따라 집으로 바로 간다. 편의점에 들어가 초코빵을 하나 산다. 실컷 걷고 이걸 먹으면 무슨 소용이냐 싶으면서도 이 정도 걸었으니까 초콜릿 하나 먹어도 되지 싶은 마음이 앞선다. 커피와 초코빵을 맛나게 먹으며 산책길에서 찍어 온 사진을 확인한다. 막연하게 산벚꽃나무라고 여겨온 놀이터 앞 키 큰 나무의 이름이 산가막살나무인 것을 확인하고 그림 자료 폴더로 사진을 옮긴다. 밤에 아이와 함께 잠들지 않으면 그림 일기장에 그려 넣을 수 있겠지.

왕참나무의 4월

 잠깐이라도 걸으려고 애쓴다. 움직이지 않고 집안에 고여서 뭉그적거리면서 기운을 소진하면 슬퍼지니까, 밖에 나가 움직이면서 나무와 하늘을 많이 보려고 노력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뻔하고 빠른 길을 두고 십 분씩 둘러서 조금이라도 더 걷는다. 여린 잎이 고운 4월의 나무를 놓치지 않으려고 가지 끝을 유심히 본다. 공장과 아파트 사이에 끼인 언덕과 산이 진초록이 되기 전에 자주 걸으러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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