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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Apr 03. 2024

남이 차려주는 밥

누가 밥 좀 차려주세요. 급식도 좋고요.



 제힘으로 끼니 챙겨 먹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밥 해 먹는 게 중요한 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걸 모르고 살았다. 어릴 때 부엌일은 엄마 아니면 할머니가 했고, 다 자라서는 내 몫의 일을 여동생이 했기 때문에 요리와 설거지 같은 주방일은 나의 ‘담당’이 아니었다. 주방일 뿐만 아니라 집안 살림을 제대로 한 적이 없다. 나는 장남이 아닌 장녀이므로 기본적인 청소, 빨래, 설거지할 줄도 몰랐다는 의미는 당연히 아니고, ‘내 일’이라 여긴 적이 없다는 말이다. 굳이 하지 않아도 나 대신 누가 해주었기 때문에 집안일의 실체를 몰랐다고 할 수 있겠다.


 결혼하면 혼자 집안일을 다 해야 한다고 남편이 진솔하게 귀띔해 주었더라도 결혼 전의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남편이 전업 회사원이고 내가 전업주부라면 못 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실제로 결혼 후에 남편은 집안일을 나누어서 하겠다고 약속했고, 당연한 듯이 약속을 어겼다. 글을 읽다가 ‘내 남편은 집안일 잘하는데?’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분이 있다면 나가주세요. 부러우니까.


 집안일이 얼마나 귀찮은지에 대해서는 목이 쉴 때까지 떠들 수 있지만, 제목대로 밥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요리를 즐기지 않는다. 즐기지 않기 때문에 양심적으로 반찬 투정은 하지 않는다. 빵이나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이 아무렇지 않고, 며칠 전 만든 찌개를 다 먹을 때까지 같은 메뉴를 먹어도 괜찮다. 제 입으로 아무거나 다 잘 먹는다고 말했던 남편이 매끼니 불평할 때마다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상한 마음을 숨기다가 어찌나 눈물 콧물을 빼며 싸웠는지 일일이 쓰고 싶지 않다. (이미 너무 말했고, 웬만큼 쓰기도 했…나?) 노력한다고 했는데 ‘맛없다.’, ‘이건 너 먹어라.’ 따위의 반응을 몇 번 당해보면 그 메뉴는 다시 만들기 싫어지는 법이다. 내가 무슨 명랑만화 주인공도 아니고 “엄청 맛있게 만들어서 너를 깜짝 놀라게 만들어 주겠어!” 이럴 수는 없지 않은가. ‘제가 무슨 수라상 받는 왕도 아니고, 어디서 나를 상궁 취급해.’ 속으로 욕하고 점점 요리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 실제로 싸울 때 “네가 무슨 한식 대첩 심사위원이냐!”라고 외쳤던 날이 떠올라 또 화가 나네.

 

브런치 너무 좋아

 달걀을 부칠 때 기름 튀는 게 싫어서 네이버 블로그를 검색했더니 나보다 먼저 방법을 마련한 선배들이 있었다. 내열 용기에 기름을 살짝 두르고 달걀을 하나 까 넣는다. 반드시 젓가락으로 노른자를 터뜨리고 랩이나 실리콘 덮개를 씌운 후 전자레인지 1분. 그 그릇에 밥을 바로 넣고 간장과 참기름으로 쓱쓱 비비면 간장 계란밥 완성! 이렇게 만든 프라이는 바삭함과 고소함이 부족하고 식감도 별로이지만 설거지는 숟가락과 오직 그릇 하나! 그렇다고 간장 계란밥만 먹고살 수는 없으니까, 나도 요리하기는 한다. 내가 하는 요리들은 대략 김치찌개와 된장국, 미역국, 카레와 짜장, 만둣국, 떡볶이와 라볶이, 파스타, 채소전, 볶음밥 정도? 쓰다 보니 꽤 많잖아?


 이 메뉴들의 공통점은 냄비나 팬을 하나만 써도 되는 요리라는 점이다. 재료를 몽땅 섞어서 끓이거나 볶거나 굽거나 하면 한 가지 반찬으로 끼니가 되는 메뉴가 최고다. 데치고 볶고 무치는 밑반찬은 종종 반찬가게에서 사 오고 김치는 어머니들이 가득가득 챙겨주시니까, 거기에 냉동 떡갈비나 비엔나소시지가 있으면 내 기준 웬만큼 성의를 담은 밥상이라 생각한다. 어차피 정성 넘치게 만들어보았자 식구들이 잘 먹어주지 않아서 노력을 아끼기도 하지만.


 비빔밥이나 잔치국수처럼 먹기 간단해 보이는 한 그릇음식은 그릇 하나에 담겼을 뿐, 준비 과정은 열 개도 넘는다는 것을 잘 아는 지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남이 해주는 밥'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배달. 내가 선호하는 배달 음식은 햄버거와 피자, 치킨(초등학생 생일파티 상 스타일 메뉴)으로 설거지가 적은 메뉴가 우선순위이지만, 남편이 좋아하는 찜닭 같은 걸 먹으면 요리하지 않아도 음식물쓰레기와 설거지가 여럿 나온다.

아름다운 빵

 배달 음식도 차리고 치우는 과정이 내 일이니까, 밥상을 완벽하게 차려주고 치워주는 외식이 제일 좋다. 어쩌다 한 번 하는 가족 외식은 아이가 좋아하는 갈빗집에 가거나 단골 칼국숫집에 간다. 식구들과 먹는 밥이 제일 맛나고 즐거우면 오죽 좋으련만, 식사는 역시 입맛이 잘 맞는 친구와 하는 게 제일 즐겁다. 평일 점심으로 분식집에서 김밥과 라면을 나눠 먹어도 좋고, 남편은 질색하는 쌀국숫집도 친구와는 갈 수 있다. 종일 장대비가 내린 어제는 늦은 점심으로 등촌샤브칼국수를 먹고 배를 두드리며 집에 돌아왔다.


 배달과 외식 메뉴는 자극적이면서 비슷비슷한 맛에 질린다는 사소한 단점과 돈이 많이 든다는 치명적 문제점이 있어서 친구와 나는 서로 점심을 차려주기도 한다. 주메뉴는 떡볶이와 라따뚜이 파스타, 김치볶음밥과 나물전이다. 역시 설거지와 잔반이 적게 나오는 메뉴이다. 우리는 서로 차려주는 밥상 앞에서 언제나 후한 리액션을 주고받는다. “아이고, 이렇게 얻어먹어도 되나? 너무너무 너무너무 맛있다! 다음에는 내가 해줄게.” 까르르 깔깔 웃으며 밥을 먹고 헤어질 때는 서로의 냉장고에서 고등어나 양념불고기 같은 걸 덜어주며 저녁거리를 해결한다.


 쪼갠 시간에 써서 이어 붙인 조각보 같은 글을 멈추고 몇 날 며칠이 흘렀다. 그 사이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밥상을 차리고 치웠다. 그제 시가 제사에 다녀올 때는 나물 반찬과 부침개를 한 보따리 얻어왔다. 남편이 혼자 중국집 짬뽕을 먹는 동안, 나는 친구와 아이를 초대해 헛제삿밥 같은 밥상을 차렸다. 지난봄 어머님이 산에서 꺾어와 말린 고사리, 정원 앞 텃밭에 심었던 도라지와 이름 모를 말린 나물들. 시골에 가야 얻을 수 있는 진한 참기름과 꼬소한 참깨를 듬뿍 넣어 어찌나 맛났는지 말로 하기에 부족한 나물 반찬이 행여나 상할까 봐, 얼른얼른 먹어야지. 하며 친구를 부른 것이다.


 한달음에 달려온 친구는 '이렇게 맛난 나물은 비벼 먹기 아깝다.'라며 한 젓가락 한 젓가락을 소중하게 맛보면서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나는 어린이들이 남긴 명태전의 마지막 조각까지 먹으며 부른 배를 두드렸다. 오늘 아침에도 나물밥을 한 사발 비벼 먹고 커피믹스까지 마시고 일을 보러 나왔더니, 점심때가 되어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기름에 볶은 나물 반찬이란 얼마나 감칠맛 나고도 포만감 가득한지.


 일로 만난 미팅이라는 이유로 소고기국밥을 얻어먹고 난폭운전 하는 버스에 실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메모장에 이어 쓰는 이 글은 역시 제목대로 '남이 해주는 밥이 최고다'로 끝나겠지만 나는 정말이지 요리를 잘하고 싶다. 좋아하고 싶다. 주부 9년 차라서 그럭저럭 해내는 밥상 차리기 미션이 아니라, 진심으로 요리에 애정을 느껴서 도전하고 싶다. 그렇게 각양각색의 요리에 도전하고, 실패도 성공도 즐거이 만나다가 어느 순간 나만의 조리법을 만들어 내고 싶다. 아직 현실은 레시피 검색에 언제나 '간단'을 붙이는 수준이지만, 달걀프라이는 프라이팬이 굽게 되었으니까 또 이만하면 발전했다고 우겨본다. 나는 정말이지 요리를 좋아하고 싶다. 순수하게 나만을 위한 요리를 준비할 때 설거짓거리를 계산하지 않고 콧노래를 부르는 날이 오길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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