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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Jun 12. 2024

나갈 수 없다면 영화

정신없고 쓸데없는 이야기지만



 김영민 선생님은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 평론에 "밤만으로는 부족하여 대낮에도 꿈을 꾸고자 하는 자들은 오늘도 극장으로 향하여 마음 저 깊숙이 보고 싶었던 것들을 스크린에서 본다."라는 멋진 문장을 썼다. 멋들어진 문장을 욕심내다가는 마침표 하나 찍을 수 없는 분수를 잘 알기에, 영화를 대하는 진지하고도 엉성한 나의 애정을 떠오르는 대로 이야기하려 한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내가 사랑하는 영화들의 목록’을 나열하게 되겠지만, 언제는 안 그랬던가?


 1월에 일 년이 한 장에 그려진 독서 달력을 벽에 붙이자마자, 일주일에 한 칸 채우기도 힘들다는 걸 깨달았다. ‘새해에는 책을 많이 읽어야지, 올해에는 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지, 이제부터 집밥을 잘 챙겨 먹자.’ 같은 소박한 다짐으로 어떻게든 달력의 네모를 채우고 싶어져서, 영화와 드라마도 써넣기로 했다. 마침 보는 영화마다 재미있기도 했지만, 칸을 채우는 보람이 더해져 거의 보름 동안 매일 한 편씩 영화를 봤다. 휴대폰 바탕 메모장에 써둔 보고 싶은 영화 목록을 열어서 찾아보기도 하고, 넷플릭스나 왓챠에서 눈에 띄는 걸 보기도 했다. 보고 싶은, 봐야 할 영화의 목록은 끝이 없으니까, 아이가 잠든 후에 정신을 차리기만 하면 매일 영화 보는 일이 어려울 건 없다.


 ‘오늘은 기필코 종일 영화를 보겠다!’ 굳게 결심하는 날도 있다. 며칠 동안 바깥 일정이 이어졌거나, 시골에 다녀와 기력이 떨어졌을 때, 극장에서 놓쳤던 티모시 샬라메 영화가 비티비에 떴을 때가 그런 날이다. 카니발리즘이라는 소재가 두려워 미루던 <본즈 앤 올>은 각오한 만큼 쉽게 잊히지 않을 충격적인 장면들이 이어지는 영화였는데, 그 와중에도 영상미가 어마어마했고 서사가 아름다웠다. 주인공 테일러 러셀이 내 취향의 미녀였지만 티모시의 까끌까끌한 얼굴과 저세상 패션에 어찌할 바를 모르기도 하면서 영화에 푹 빠져들었다. 영화가 끝나고 여운이 길게 남아 도무지 꿈자리가 사나울 것 같은 밤에 눈과 마음의 정화를 위해 <듄 파트1>을 다시 봤다. 아, <듄 파트2>가 개봉했을 때는 누구보다 빠르게 극장에 달려갔고, 집에서는 하루 종일 OST를 들으며 따라 부를 수 없는 음악을 흥얼거리곤 했다. 리산 알 가입! 파트 1의 티모시는 예뻤고, 파트 2의 티모시는 멋졌다. 그러니까 리산 알 가입!

 배우 구교환이 좋아져 필모그래피를 쭉 보다가 <꿈의 제인>처럼 속상해지는 영화를 본 후에는 화면이 고운 웨스앤더슨의 영화를 찾아본다. 최근에 본 <애스터로이드 시티>가 특히 마음에 쏙! <파묘>를 보고 와서 공포심과 반일 감정이 가슴 속에 일렁일 때, 한참 동안 볼까 말까 망설이던 <한산:리덕스>를 틀었다. 박해일이 연기하는 이순신이 좋았고, 거북선이 등장하는 해상 전투 장면에 전율이 일었다. 무엇보다 <파묘>와 다른 시대이지만 침략한 왜인들이 처참하게 패배하는 장면이 체기를 싹 내려주는 듯해서 개운하게 잠자리에 들 수도 있었다. 개운하게 눕자마자 낮에 본 <파묘>의 무서운 장면이 떠올라 잠든 아이의 손을 꼭 붙들었지만 말이다. 원래도 팬이었던 김고은과 이도현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고, <검은 사제들> 이후 잊고 지내던 장재현 감독을 향한 애정이 솟았기에 다음날 용기를 내어 <사바하>를 보았다. 밝은 오전에 보아도 흠칫하는 장면이 있었지만, 보길 잘했다 싶은 멋진 영화였다.


 영화를 좋아하지만, 극장에 자주 가지는 못한다. 표도 비싸거니와 극장에 가는 버스 노선이 변변찮고, 결정적으로 소도시에는 보고 싶은 영화의 개봉관 자체가 드물기 때문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보려고 결심했지만, 개봉 일주일 만에 내려가는 현실. 지난겨울에도 그렇게 놓친 <추락의 해부>를 어젯밤에 보았다. 어휴, 어질어질했다. <러브리스>만큼 억장이 무너지진 않았지만, 독한 이야기와 대단한 연기였다. 자기 전에 <오피스>를 틀려다가 눈 건강을 위해 참았다.

갑자기 떠오른 영화, 괴물

 애정 기반의 취미 생활이긴 하지만 내가 영화나 드라마를 끊임없이 보는 행위에는 도피가 기본값으로 깔려 있다. 현실로부터의 도피. 나로부터의 도망. 내 생각과 내가 조화롭게 지내지 못하는 대부분 시간에 눈으로 귀로 마구 밀어 넣는 자극적이고 복잡한 완결의 세계. 이 순간 해야 할 집안일과 해야 할 것 같은 구직 활동, 건설적인 기타 등등의 열 일을 제쳐두고 영화에 몰입한다. 나갈 수 없다면, 나갈 힘이 없다면, 정신과 마음이라도 저 멀리멀리 진짜가 아닌 곳으로 내보낸다. 뒤통수를 후려칠 듯 강렬한 이야기, 이 세상의 것이 될 수 없는 판타지의 세상, 알록달록하게 채색된 꿈나라, 미인들이 보통인 듯 돌아다니는 이국의 거리, 정의가 있고 신비가 있는 세계, 세련되게 벼려낸 지옥을 그리는 화면. 뭐든지 좋다.


 스토리가 이어지는 드라마라면 하루에 8시간씩 이틀 정도 몰입할 수도 있지만, 영화를 그만큼 보기는 힘들다. 어쩌다 하루에 4 작품을 볼 때도 있지만, 그럴 때면 원치 않는 두통과 눈 시림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미드소마>를 보고 내친김에 <유전>을 연달아 보는 용기 있는 도전을 하고 아리에스터 감독에게 박수를 보낸다. 오묘하게 불쾌한 영화의 잔상이 나를 감싸면 텔레비전을 끄고, 좀 쉰다. 밝은 기운이 필요하다. 그럴 때는 <빨간 머리 앤>을 틀어둔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대자연과 수다스러운 앤의 목소리,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기운에 신산스러운 마음이 차분해진다. 라면을 끓이거나 냉장고에 있는 국을 데워 끼니를 때운다. <알 포인트>를 보고 공포에 떨면서 <반지의 제왕> 감독판을 찾아보던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참 한결같다.

 4시간짜리 <저스티스 리그:스나이더 컷>을 볼 때는 부릅뜬 눈이 피로하고 소파에서 앉았다 누웠다해도 편한 자세를 찾을 수 없다. 그래도 다음 내용이 궁금하니 영화 보기를 그만둘 수 없다. 일시 정지를 누르고 커피를 한 잔 타본다. 조롱거리로 전락했던 영화가 살아났다는데 4시간이면 어떠냐! DC 유니버스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히어로들은 멋지지 아니한가! 제임스 건이 살린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어쩐지 사랑하게 되어버렸다. 마고 로비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그런 빻아버린 세계라니 반할 수밖에.


 문장을 정확히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화면은 어렵지 않게 배경음악과 함께 떠오른다. 의미 없이 울적한 순간,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시시콜콜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머릿속에서 음악이 울린다. 딴딴딴딴 따다다단, 규칙적인 네 박자의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미스 리틀 선샤인>의 오프닝 테마이다. 식빵에 딸기잼을 바르고, 커피를 한 잔 끓여서 텔레비전을 켠다. 소장 영화 목록에 있는 샛노란 포스터를 누른다. 울적한 마음이 나아지면 케이트 블란쳇이 나오는 심란한 영화<타르>를 다시 봐야지. <헤어질 결심>을 또 볼까? 보고 나서 센티멘털해지면 <바비>를 다시 봐야겠다. 이런 식으로 영화 보는 시간은 계속된다. 아름다운 강동원님을 보러 <설계자>를 보러 갈 것인지, 핑계고에 나온 동원님을 보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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