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걸려도 괜찮은 버스 타기
버스를 탈 때 좋은 승객이고 싶다. 교통카드를 손에 들고 '내가 이 버스에 탈 것임' 기운을 담뿍 담은 눈으로 운전석 쪽을 바라본다. 버스에 오를 때는 재빨리 카드를 찍으며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한다. 인사에 화답이 올 확률은 50퍼센트, 답이 오면 기쁜 마음, 답이 없어도 괜찮다. 움직이는 버스의 덜컹대는 리듬에 맞춰 뒷문 뒷뒷자리에 앉는다. 바퀴 때문에 솟아오른 창쪽 자리에 앉은 무릎을 세우고 가방을 올린다.(치마 입은 날에는 한 칸 더 뒤로 이동)
까만 이어폰에서는 팟캐스트나 피아노 협주곡이 흘러나오고 있다. 폰을 꺼내 요일별 웹툰을 차례차례 본다. 무심결에 19금 작품을 눌렀을 때 내적 동요를 드러내지 않고 뒤로 가기. 인스타그램과 블로그, 브런치까지 확인하고 창밖을 본다. 버스에서 보는 풍경은 승용차보다 높아서 시원하다. 조금 더 먼 곳까지 볼 수 있다. 창밖 풍경에 시선을 던질 때마다 20대 때 들었던 친구 오빠의 말이 떠오른다. "버스 타면 혼자 뮤직비디오 찍는 애들 꼭 있지." 그윽한 눈빛으로 먼 곳을 응시하는 젊은 여자애를 놀리는 말투였다. 뭔지 알지, 알아. 하며 낄낄 웃었지만, 아무 데서나 담배 피우면서 똥폼 잡는 주제에 별 걸 다 비웃는다 싶었다.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기억을 흘려보내며 다시 밖을 본다. 눈이 부시면 눈을 감고, 지루해지면 선글라스를 꺼내 쓴다. 도수가 들어간 까만 선글라스를 끼면 세상은 한결 짙고 선명해진다. 모든 사물과 풍경에 뚜렷한 경계선이 생기고, 세상이 눈으로 몰려들어온다.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보며 잠깐씩 공상한다. 어디로 가는 걸까? 버스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가방에는 뭐가 들어있을까? 저 어린이는 왜 이 시간에 엄마와 함께 있지? 꽃무늬 점퍼를 입은 할머니는 중앙시장에 내리려나, 아니네, 터미널 앞에 내렸네. 휴가 나온 군인이네. 군복은 늘 더워 보인다. 저 아저씨는 이어폰을 꽂지 않는구나, 이어폰 따위는 갖고 있지도 않겠지? 다행이다, 나에게 이어폰이 있어서.
옆자리에 누군가 앉는 경우는 잘 없지만, 때로 버스가 붐비면 내 자리 경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유의한다. 이어폰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는지, 메모장에 쓰고 있는 글이 보이지 않는지, 내 가방이 옆사람의 몸에 닿지는 않는지. 대부분의 경우 그 역시 나처럼 옆자리를 넘어오지 않으려 조심하는 기운을 풍긴다. 역에 가까워지면 버스 전체를 둘러본다. 내리는 사람이 많다면 버스에 쓰인 대로 정차 후에 일어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