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욕과 약 사이의 평온

약 한 달째 기록

by 원효서


석 달 만에 만난 친구의 이야기. 둘째의 학원 선생님에게 이런저런 하소연을 하자 선생님이 "어린이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원래 그런 거예요. 우리 애도 똑같아요. 그래서 제가 약을 먹죠."라고 말했단다. 그러니 본인도 약을 먹어야 하는 걸까 싶다기에 자연스레 내가 먹는 약 이야기를 꺼냈다.


"화가 날 상황을 피할 수 없고 화를 참을 재주가 없으니까 약으로 화가 덜 일어나게 돕는 거지. 정말 화가 잘 안 나긴 해. 짜증도 안 내고, 근데 차분해지니까 재미있고 신나는 기분에도 둔해져. 쭉 기복이 없지."


정신과 약에 관해 잘 알지 못하지만 병원과 책에서 배운 바에 의하면 내가 받는 약은 대충 신경을 안정시키는 데에 도움을 주는 계열이다. 욱! 하고 치솟는 분노와 슬픔, 공포와 불안을 완화하는 약물. 여름에 새로 만난 의사 선생님은 이런 표현으로 나를 안심시켰다. "물이 찰랑찰랑 가득한 잔을 들고 걸어 다니면 어떻겠어요? 한 발짝만 움직여도 물이 넘치겠죠? 물컵에 든 물을 줄여주는 거예요. 휘청해도 쏟아지지 않도록."

의사도 친구들도 같은 질문을 했다. 무슨 계기로 정신과를 찾게 되었나요? 내 대답도 한결같다. 화를 너무 많이 내서, 욕을 너무 많이 해서, 상대가 없을 때 혼자서 쌍욕을 하고 자신이 너무 싫어져서. 의사 선생님은 약을 처방해 주었고, 친구들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왜 혼자서 욕을 하는지 물어보았다. 남편 들으라고 큰소리로 욕을 한다는 친구는 혼자서는 욕할 일이 없다고 했다. 그렇게 청자가 있는 욕은 자기혐오로 이어지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내가 내뱉는 쌍욕은 보통 나 자신에게만 들린다. 동네친구들과 시시껄렁하게 주고받는 험담 가운데 주고받는 비속어들과는 다르다. 혼자 있을 때 하는 욕은 거세고 거칠고 사납다. 욕을 듣는 사람 역시 나이기 때문에 방귀나 트림처럼 시원하지도 않다. 자학적이고 멈출 수가 없다.


이런 욕이 간혹 아이에게 튀어나올 때, 그 단어 자체는 별 거 없이 시시한 음절에 불과할지라도, 그 순간 나는 쓰레기가 되고 만다. 무슨 합리화를 해도 나를 긍정할 수 없다. 몇 번 더 반복하다가는 망가진지도 모를 만큼 엉망이 된 나로 살아갈 수도 있다. 그래서 욕과 고함 대신 약을 선택했다. 잔잔하고 약간은 지루하고 갑갑한 평온.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