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면 되지?
나를 붙들고 제 자랑거리를 늘어놓는 사람은 잘 없다. 자랑에 대한 글을 쓰려고 시작한 것도 내 경험과는 별 상관이 없기도 하다. 지난봄에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어 써본다. 엄마를 포함해 5명의 주부들 모임이 있단다. 모두 농사짓는 집에 고만고만한 형편인데 그중 한 사람이 자꾸 명품백을 들고 모임에 나온다고 했다. 그 집 남편은 멤버들 가운데에서도 유난히 농사에 열심이고, 바깥에 돈 쓰러다니지도 않는단다. 그런데 주부모임에 나오는 아주머니는 명품백이 하나 둘도 아니라, 모임 때마다 다른 가방을 들고 나온다고 했다. 알은체 하지 않으려 해도 카페나 식당에서 가방을 테이블 위에 척 올리고, 새로 산 가방이라고 꼭 자랑을 하니 엄마와 다른 아주머니들도 무시하기 힘든 것이 당연지사.
엄마는 말했다. "그런 사치스러운 가방을 가지려는 욕심도 없었지만, 자꾸 자랑을 해대니까 부러운 마음도 들더라. 그래서 전에 한 번은 아빠랑 같이 가방을 사러도 가봤다."
"아빠가 그런 거를 사러 나서?"
"명품가방은 자식한테도 물려주고, 되팔기도 하는 재산이라는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하나 정도는 사도 되겠다고 하더라고."
"샀어야지, 그럼 그때!"
"너무 비싸더라. 나도 하나 갖고 싶었지만, 가방 하나에 그 돈을 주고는 차마 못 사겠더라. 금붙이도 아니고."
엄마는 결국 비싼 가방을 사지 못했다. 예전에 산 10만 원대 핸드백을 언제까지나 들고 다니겠지.
물론 나는 명품 가방에 관심이 하나도 없어서 샤넬과 구찌처럼 딱 보면 아는 브랜드 외에 아는 게 하나도 없고, 옷이고 신발이고 10만 원 넘어가는 물건도 잘 가지지 않는다. 어쩌다 가끔 비싼 물건이 갖고 싶어 져도 오래 괴로워하지 않고 포기한다. 집이나 자동차가 아니라면 못 가져서 슬플 건 없었다. 책을 좀 많이 사긴 하지만, 명품 가방에 비할 일이랴.
아무튼 엄마와 친구들은 내년부터 그 주부모임에 명품 가방 아주머니를 빼기로 했단다. 자랑도 잘난 척도 정도가 있어야 받아주는 법이라고, 꼴값을 더는 못 참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네 사람이 명품가방 계를 시작할까 말까 고민 중이라는데, 아주머니들 간이 작아서 가방에 큰돈 쓸 수 있으려나 싶다. 커피 한 잔 사지 않고 가방 자랑만 한다는 그 아주머니는 어디 가서 자랑하려거든 빵이라도 한 조각 사주면서 하길 바란다.
20대 때 친구와 잠깐 다니던 헬스장에는 고인 물 아주머니가 있었다. 짧은 앞머리를 까만 나이키 헤어밴드로 야무지게 올린 숏컷 머리 아주머니는 엄마뻘 정도 되어 보였다. 아주머니는 한가한 평일 오전 시간, 텅 빈 헬스장의 뉴페이스 젊은 아가씨들에게 샤워실에서 생리대를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까지 상세히 알려주는 반장님 스타일이었다. 아주머니는 내가 멋 모르고 들어갔다가 탈진 직전에 이르렀던 스피닝 수업에서도 역시 고인물, 언제나 운동의 마무리는 거꾸리였다. 무서워하는 나와 친구에게 거꾸리의 효능을 읊으며 매달릴 때까지 권하던 사람도 트레이너들이 아닌 아주머니였다.
동네에서 노래방을 하는 그 아주머니는 발이 넓고 말이 많았다. 운동하는 모습을 보면 체력도 장난이 아니었고, 샤워실 앞 평상에서 수다 떠는 걸 보면 성격도 화끈했다. 아주머니가 친구들과 신명 나게 누군가를 씹고 뜯고 있었는데 말인즉슨, 여편네 하나가 싱가포르 다녀온 걸 몇 날 며칠 자랑한다는 거였다. 그노무 라텍스 나부랭이는 딱 봐도 강매당한 꼬라지던데 얼마나 자랑을 해대는지, 아주 못 볼 꼴이라고. 요새 누가 해외여행 갔다 온 걸로 거들먹거리는지, 라텍스 따위는 한국에서 사도 좋기만 한데 뭐 대단한 걸 샀다고 으스대는지, 지 누워 자는 거 사놓고 남들한테 부러워하라고 아주 난리법석이라고 언성을 높였다. 앞에 앉은 친구들 역시 공감하는 듯 연신 맞장구와 박수를 쳐가며 신명이 났다.
나도 괜히 선풍기에 머리를 천천히 말리면서 이야기가 파하도록 듣고 있다가 눈이 딱 마주쳤다. 아주머니는 약간 멋쩍은 표정으로 웃으며 목소리를 줄였다가, 뒷담화를 마무리했다.
"그러니까 자랑질을 하려면 끔(껌)이라도 한 통 돌려야지. 지 돈 쓴 자랑을 해대려면 남들한테 주는 거라도 있어야 되는 거야."
오호라, 그랬다. 그날 배운 인생의 가르침은 자주 떠올랐다. 좋은 일이 있으면 한턱내는 법, 뭐라도 자랑할 때는 험담할 때보다 청자를 신중히 택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