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가 바라는 일
ㅡ주의 : 욕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선배는 나와 썩 코드가 맞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와 코드가 잘 맞는 복학생 병희 무리에 가끔 나와 모두 술을 마시며 놀 때 운전을 해주는 사람이었다. 친구나 후배가 놀리면 숫기 없는 초등학생처럼 얼굴이 빨개지는, 재미없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선배와 내가 언제부터 친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연우가 군대에 간 가을부터 자주 연락을 주고 받았던가? 연말이라고 우르르 무리지어 선배네 집에서 술을 마시며 엠티 분위기를 냈던 날부터였나? 선배는 내가 좋다고 말했다. 남자 친구가 있어도 상관없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했다. 나보다 6년 먼저 대학생이 되었으니 아마도 내가 금방 헤어질 거라는 걸 예상했을지도 모르겠다. 마음 전부를 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남자는 처음 만났기에 오히려 마음이 동했다. 선배가 내 스타일이 아닌 점, 별로 매력이 없는 점도 안전한 포인트처럼 느껴졌다. 이 만남으로 내 마음이 크게 다칠 일은 없을 거야. 별로 상처받지 않을 거야. 속 편하게 선배의 관심을 받아 보기로 했다.
언뜻 순수해 보이던 고백에서 두어 달 지났을까? 선배는 술자리에서 모두가 듣는 앞에서 ‘몇 명이랑 잤느냐’라고 해버린 것이다. 그날 밤, 집요하게 키스를 퍼부으며 질리도록 가슴을 만져대는 선배에게 깔려있을 때 나는 눈알을 굴리며 ‘쿨이란 무엇인가’를 연구했고, 도저히 쿨할 수 없는 상황을 견디지 않기로 했다. “그만해요. 비켜요.” 선배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눈빛을 확인하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컴퓨터 의자에 앉아 등을 돌린 선배, 주섬주섬 브래지어를 내리고 구겨진 티셔츠를 펴는 나. 드문드문 들리는 마우스 클릭 소리. 새벽 2시, 엄마에게는 친구네 집에서 자고 들어가겠다고 했으니 집에 들어갈 수도 없었고 달리 갈 곳도 없었다.
“같은 침대에 있지만 너랑 몇 미터는 떨어져 있는 것 같더라. 걔랑은 잤는데 왜 나는 안 돼? 그만하라는 목소리가 얼마나 낯설고 듣기 싫던지.”
선배는 한참 후에 말했다. 생일 선물을 빼앗긴 아이처럼 서러워했다. 엿같은 상황을 박차고 나가지도 못하는 나야말로 서운했다. 애인이 아니어도 괜찮다며? 곁에만 있어도 좋다며? 그런데, 뭐? 뭐가 어쩌고 저째? 그러니까 그냥 나랑 당장 자고 싶다는 거잖아. 내가 너랑 하고 싶든지 말든지 상관없이.
선배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호불호가 분명한 성격이지만 바운더리 안에 들어온 사람에게는 물러터져서 그저 다 받아줬다. 특히 애인이라면 뭐, 조르면 다 해줬다. 안 해주면 얘가 나를 싫어하지 않을까? 만날 때마다 조르기만 하는 거 아니야? 그렇다면 헤어져야 하나? 하지만 헤어지기 싫은데? 그렇다면 방법이 없잖아. 온 세상이 섹스섹스섹스 난리법석인데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거겠어? 해치우자. 해치워 버리자. 별거 아니게.
과연, 별거 아니었다. 시시했다.
나 좋다는 사람이니까 서운할 수 있겠다고, 쉽게 납득했다. 나라도 거절당하면 속상하겠지. 여친이랑은 잤으면서 나랑은 안 잔다고 하면 기분이 아주 더럽겠지. 그렇지만 다음 달에 남친이 휴가 나오면 정식으로 헤어지고 선배와는 정식으로 사귀고 싶었다. 그러면 제대로 사귀고 제대로 키스하고 제대로 잘 수도 있을 테니까. 잠 못 들던 그 새벽, 선배의 첫 경험과 구여친 이야기까지 들었다. 그리고 같이 잤냐고? 그럼 당연하지. 거절하는 법은 배운 적이 없는걸.
-덧붙이는 이야기
어디까지 솔직한 연인을 원하는가? 나는 화장실 안에서 벌어지는 일만 빼고 전부 알고 싶었다. 친구들에게 말하지 못한 비밀, 전여친에게도 말한 적 없는 경험, 그리고 전여친과의 만남과 이별까지. 7살 연상인 남자 선배는 나에게 해줄 말이 많았다.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다 알려주었다. 그 누구도 나에게 해주지 않은 성매매업소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남자들은 스무 살이 되면(혹은 군대에 가기 전에) ‘아다를 떼야 한다(동정을 벗어나야 한다? 첫 경험을 해야 한다? 숫총각이 아니어야 한다? 같은 표현도 있지만, 그들의 언어에 가깝게 써보았다)’는 사회적 관습이 있었다. 역 근처에는 성매매업소 밀집 구역이 있었고, 간혹 거기서 길을 잃은 경험담이 여자애들 사이에서 무용담이 되기도 했다.
노는 오빠들과 함께 차를 타고 빨간 불빛이 늘어선 거리에 들어섰더니 얇디얇은 옷을 입은 젊은 여자들이 호객하러 다가왔다고 했다. 실수로 창문을 내려 눈이 마주치자 사근사근하던 눈빛이 일순 사나워지며 앙칼진 욕을 들려왔단다.
“미친 썅년이 왜 왔는데? 구경 왔어? 씨발년이, 꺼져라!!”
그 거리는 어떤 곳인지 늘 궁금했다. 동네에도 있고 학교 후문에도 있는 안이 보이지 않는 술집들(토담집, 야생마, 춘향이 같은 간판들)은 어떤 공간일까. 알고 싶지만, 알 길이 없는 장소들 말이다. 거기에 들어가려면 내가 손님이 되는 방법이 무난했지만, 나이트클럽보다 단호하게 입구에서 밀려날 성싶었다. 그렇다면 취재나 취업? 인류학이나 사회학 수업 과제로 취재를 나가도 받아주지 않겠지? 취업? 그래서는 안 될 거고. 술자리에서 남자 선배들이 낄낄대며 주고받는 소리에 따르면, 그런 가게는 방석집이라 부른다고 했다. 깡패가 주인공인 영화에 흔히 나오는 룸살롱의 저렴한 버전인 듯.
선배가 내게 몇 명과 잤는지 물었던 그 밤, 선배도 자기가 몇 명과 잤는지 말했다. 우리는 그게 공평하다고 여긴 걸까?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대학 2학년 때 입대를 앞두고 선배는 병희와 술을 한 잔 마시고 역 앞을 헤맸다고 한다. 그러다가 나이를 알 수 없는 여자에게 이끌려 어딘가로 들어가서 3만 원을 내고 ‘그 의식’을 치렀고 기분이 몹시 더러워졌다고 했다. 첫 경험을 그렇게 날린 선배는 두 번 다시 그런 짓은 하지 않았고, 병희를 포함한 다른 남자들이 혐오스러워졌다고 했다. 이해할 만한 설명이었다. 과연 남자들은 대부분 성매매를 당연히 여기는 세상이었다.
병희 무리에 속한 누군가의 친구가 높은 금액을 내고 ‘긴 밤’ 요금을 결제했는데 과음으로 일찍 잠이 들었단다. 자다가 번쩍 정신을 차리고 본전 생각에 두 번 더 했다는 말을 낄낄대며 했다는 이야기, 직업군인이던 어떤 형이 근무지역 다방 여자와 같이 사는 동안 어떠했다는 이야기도 선배가 해주었다. 내가 겪지 않은 세상이 거기에 버젓이 있었다. 선배는 그런 놈들과 어울리는 일을 수치로 여겼지만 나는 상관없었다. 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어서 나와 무관한 세상처럼 느껴졌다. 스타크래프트와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보다는 현실감이 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