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병원 정말 많이 가는데, 안 아파서 괜찮음
11월 11일 화요일
섬유선종 제거 후 경과를 보기 위해 병원에 가는 날이다. 대구까지 운전해도 1시간인데 기차에서 음악 듣고 책 읽고 싶어서 구미역에 주차했다. 시내 도로 공사로 차가 엄청 막혀서 기차표를 취소했다가 5분 지연된 덕분에 다시 예매를 하고, 급똥까지 해결하고 기차를 탈 수 있었다. 그러나 헤드셋을 챙겨 오지 않아서 음악 없이 오만가지 노이즈를 견디며 책을 읽었다. 대경선 덕분에 승객이 적어 다행이었다. 약간 오기가 생겨서 책에 더욱 집중했더니 술술 잘 읽혔다. 책이 재밌기도 했고.
병원 바로 옆에 근사한 스벅 리저브점에서 동생을 만나 리저브에만 있는 라테와 스파클링 에스프레소(맥콜 맛이 남)와 크리스마스 드립을 마셨다. 병원에 왔으니까 이 정도 사치는 하지 뭐, 하면서 비싼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최의 블로그를 읽은 동생에게 내 일기를 보여주며 아이고, 아이고, 그렇다니까! 맞장구를 쳤고 귀여운 원피스를 입은 여동생 사진을 찍어주었다. 동생도 내 사진을 잘 찍어서 즐겁게 인스타스토리를 업로드했다. 인테리어가 근사하고 분위기 좋은 병원 대기실에서 일기를 쓰고 있는데, 흰 꽃 화분이 모두 조화인 점이 못내 아쉽다. 생화를 하나 정도 꽂아도 좋지 않을까? 조화를 고르려면 좀 더 얼핏 봐도 가짜 같은 서양난보다 아름다운 종류도 많은데, 모던하우스에만 가도.
데일리 친구가 카톡을 보내왔다. 유치원 참관 수업 때 먹은 존맛탱 점심식사가 담임 선생님들이 새벽 출근으로 만들어진 거였단다. 우연히 다른 학부모가 알게 되어 전해 들었다 했다. 친구와 나는 철없이 맛있다고 와구와구 먹은 과거를 반성했다. 미친, 미친 이사장. 미친 유치원. 와중에 시험 친 중3이 전화 와서 61점이란다. 아이고 두야, 내가 너네 엄마면 학원이고 과외고 다 때려치우게 할 거야. 소리치고 싶었지만 대기실이 몹시 조용해 이를 꽉 깨물고 "다들 어려웠다고 한 게 맞아?" 물어보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시술 결과는 깔끔해서 이제 보험료 걱정만 남았다. 기차를 타러 다시 나와 버스를 기다리는데, 이 동네에만 오면 20대 내내 느낀 박탈감 같은 게 떠오른다. 대구에서 가장 부동산이 비싼 범어네거리의 고급 아파트들, 남편 명의이지만 아무튼 소도시에라도 내 집이 있는 지금은 예전처럼 슬픈 눈으로 "노르웨이숲"이나 "두산 위브더제니스"를 바라보지 않는다. 나에게 범어네거리 아파트가 있다면 주저 없이 다른 부자에게 팔고 한적한 곳에 사는 편을 택할 것이라고 상상하지만, 막상 거금이 생기면 어떤 삶을 택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부잣집에 시집 가 범어네거리에 사는 한에게 전화를 걸어서 좋은 학원부터 알아볼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공상.
기차를 기다리면서 병원에서 받은 서류를 햇빛 아래 찰칵찰칵 찍었다. 바로 보험사 어플에 접속해서 보험금 신청을 마쳤다. 비급여항목이 200만 원이 넘는다. 여자 젖가슴을 그렇게도 사랑하는 남자들이 나서서 만들었을 건강보험, 가슴이 크니 작으니 유륜이 핑크니 어쩌니 평가하다가, 애를 낳으면 모유 수유하라고 젖을 쥐어짜라고 닦달하다가, 아프다고 하면 나 몰라라 너 알아서 치료하든지? 식이다. 이런 세상에 또 화를 내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양이 양성이니 얼마나 다행이냐. 애써 진정해 본다. 보험사는 지난달 이석증 진단 때처럼 시원하게 돈을 입금해 다오. 그러면 10년 넘게 부어온 실비보험을 향한 믿음이 두터워질 것 같구나.
11월 12일 수요일
10년을 벼르다가 사마귀와 쥐젖과 잡티를 제거하러 친구와 피부과에 왔다. 목에 있는 여러 잡티가 얼마나 눈에 많이 띄었는지, 무려 시어머니가 피부과에 가라며 돈을 주었다. 돈이 사라지기 전에 데일리친구와 함께 대구에 있는 저렴한 피부과(요가 선생님과 시누이가 추천함)에 와서 4회 치 레이저 시술을 결제했다. 기미제거를 하는 친구는 얼굴이 새하얘서 웃기고 마취크림을 바른 목에 바르고 랩을 감은 나도 우스웠다.
돈을 펑펑 쓰고 다녀 불안했는데 천만다행으로 보험금이 잘 들어왔다. 생활비로 또 사라질까 싶어 롯데카드 앱에 들어가 병원비만 출금시켰다.
어제 어린이 농구 수업에 체험을 간 아이는 남자애들 사이에서 제대로 뛰지 못하는 것 같았는데, 꼭 배우고 싶다는 의욕을 불태웠다. 만만한 태권도 학원은 가기 싫다고 하는데, 운동을 꼭 배웠으면 싶은 내 욕심에(나는 몸을 잘 못쓰는 내가 여전히 안타깝다) 걸스농구 광고를 보고 찾아간 거였다. 초등 저학년은 여자애가 우리 애뿐이라 한동안은 남자애들과 수업을 받아야겠지만, 겁을 집어먹은 건 아이가 아니라 나였다. 잘하 든 못하든 공을 들고 신나게 뛰어다니는 아이는 오빠들 눈치를 보지 않았다. 위에서 코트를 내려다보는 나만 '수업진행에 방해가 되지나 않을까', '오빠들이 애한테 뭐라고 하지 않을까', '애가 상처받지나 않으려나' 걱정이 늘어졌다. 농구를 배운다고 들뜬 아이를 위해 트레이닝 바지와 농구공을 주문했다. 놀이터에 따라나가서 나도 좀 움직여야겠다.(과연?)
편평 사마귀와 쥐젖이 대체 몇 개나 있었던 것일까? 레이저로 지진 자국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수제비반죽으로 둘러싸인 것 같던 마취가 풀리자 화끈화끈 가려웠다. 주근깨분장을 한 것처럼 된 친구와 목에 수천 개 까만 점이 찍힌 채 지하상가에서 상비약을 구입하고, 복어매운탕으로 점심을 먹었다. 세련된 분위기의 카페에서 아메리카노와 말차갈레트브루통을 먹었는데, 옆테이블에서 모두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걸 보니 에스프레소를 먹었어야 했나!? 싶었지만, 더 마실 시간이 없어 서둘러 구미로 돌아왔다. 늘 친구 차를 얻어 타고 다니다가 오늘은 내 차를 가져갔는데, 길을 헤매지 않고 무사히 잘 다녀와서 기분이 좋았다. 대구에 살 때는 운전하는 사람들 모두를 질투했는데 이제 대구에서도 운전을 할 수 있는 내가 대견했다. 매주 피부과에 오는 것도 친구가 있어 즐거운 나들이가 될 듯하다. 벼르던 피부미용을 해서인가? 오후에 삶의 의욕이 좀 솟아나서 빨래 개고 설거지하고 샐러드를 만들어먹을 때 밍기적대지 않았다. 아이 운동화를 빨고 티니핑 새 시즌을 함께 봤다. 보나 마나 한 애니메이션이지만 화면이 어찌나 영롱한지 순식간에 빨려 들고 만다. 끝나자마자 나오는 장난감 광고가 정신을 번쩍 들게 하네. 8시도 안 되었는데 졸린다. 에스로반을 덕지덕지 바르니 끈적거려 베개에 수건을 깔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