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초 일기
2월 2일 월요일
이번 겨울 제대로 내린 적 없는 눈이 하필이면 오늘 내렸다. 다행히 눈발이 오래가지 않아 친구 모녀와 무사히 만났다. 서울에서 눈을 실컷 보고 내려온 친구는 여기서 또 눈을 만날 줄 몰랐다고 놀라워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스팔트에 얇게 깔린 눈에 신난 어린이들은 목장갑 낀 손가락이 빨개지도록 눈을 뭉치고 던지고 뭉치고 던지고... 우리는 양지바른 곳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오랜만에 수다를 떨었다. 언제나 유쾌한 서울친구는 나를 위해 라인댄스를 춰주었고, 덕분에 깔깔 웃었다. 들떠서 소리를 꺅꺅 지르는 여름 때문에 순두부집에서는 방으로 쫓겨들어갔지만, 솥밥이 맛있었다. 낯선 동네에서 겨우 문 열린 카페를 찾아들어갔고, 밀려있던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으로 급하게 카레를 만들고 수업도 했다. 산더미 같은 설거지를 하고 발레를 배웠다. 발레슈즈가 온 김에 피곤해도 참고 운동했더니 땀이 나고 몸이 개운했다. 내친김에 미루던 뱅쇼를 끓였는데, 애매하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맛이 났다. 뱅쇼를 홀짝이며 팟캐스트를 녹음하고 나니 뿌듯했던 하루도 어느새 다음날로 넘어가고 있네.
메모장에서 발견한 구절 -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사람들은 귀엽다. 두꺼운 패딩 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슥슥 옷감 부딪는 소리를 내며 지퍼를 찾는 모습은 어른이든 아이든 서툴러서 더 귀엽다.
2월 3일 화요일
1. 어제 겨울왕국 ost를 들으면서 몇 번이나 울컥했다. 10년이 지나도 나에게 마법 같은 노래 두 곡 "let it go"와 "for the first time in forever" 운전하는 내내 두 곡만 반복하며 한 시간이나 따라 불렀는데도 매번 목이 메고 눈물이 차올랐다. 오랜만에 다시 겨울왕국을 봐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2. 오전에 발레 수업을 들었다. 세 강좌쯤 들으면 한 시간, 이마에 땀이 배어 나왔다. 선생님들이 벌써 좋아졌다. 정말 매력적이야. 선생님을 보다 보니 브라탑과 부츠컷 레깅스가 사고 싶어 졌는데, 정신 차려야지. 저렴한 발레쇼츠를 세 개 샀는데 아주 편하고 좋다. 기분은 발레리나. 거울 대신 선생님 나오는 화면을 보면서 하니 더 즐거운 듯하다. 오늘 배운 건 플리에와 아라베스크 준비 동작들. 몸이 쭉 늘어나는 느낌이 좋다.
3. 오후에는 창고 정리를 했다. 창고 정리를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책상과 수납장 등을 같이 치우게 되어 일하는 시간이 계속 늘어난다. 오랜만에 리딩 케미스트리를 들으며 이것저것 버리고 버리고 버렸다. 버리지 않고 놔뒀던 물건들을 모조리 내놨다. 10년 전에 어머님이 준 오쿠(잠깐동안은 홍삼물을 끓여 먹기도 했는데, 자리를 너무 차지하고 불편했다. 남편은 쓰지도 않는 물건이지만 함부로 버리기도 어려워서 차일피일 미루며 팬트리 가장 구석에 둔 거였다. 그 아래칸에 있는 스타워즈 알투디투 디자인 로봇청소기(성능이 구림)와 고장 난 저렴이 가습기도 버렸다. 유치원에서 받은 커다란 파일에서 종이를 분리하고 오래된 스케치북들도 버렸다. 종량제 봉투 세 개를 꽉꽉 채우면서 '진즉에 버릴걸...' 몇 번이나 후회했다.
거실에 둔 작은 책상(구 화장대)은 유리 상판 내놓기가 귀찮아서 영원히 못 버릴 성싶다. 아예 내 책상으로 제대로 쓰자 싶어서 서랍에 있는 자잘한 물건들을 싹 정리하고 물감과 팔레트와 펜을 넣었다. 책상 위에는 예쁜 원목 책꽂이와 제라늄 화분도 올려두었는데, 과연 내가 식탁을 벗어나 저 책상에 앉을 수 있을 것인가? 아무튼 내 자리를 하나 더 만들었다. 여름의 만들기 도구들과 장난감 가운데 버릴 물건이 없어서 아무래도 샘키즈 장 역시 계속 같이 살아갈 분위기. 그래도 텅텅 빈 팬트리와 깔끔한 책상 서랍을 보니 편안하다.
2월 4일 수요일
여름의 치아 교정 상담을 위해 경대 치과병원까지 갔다. 십 수년 전 반월당에 있는 학원에서 무용과 여고생들과 국어 수업을 했었는데, 그때 딱 한 번 치과병원 화장실에 갔던 것 같다. 동생과 만나 놀다 올 동선을 생각해서 구미역에 차를 세우고 기차를 탔다. 기차에서 내려 지하철 환승을 했다. 오랜만에 길을 잘 찾아야 하는 날이라 종일 안경을 끼고 있었다. 대구에 살 때는 의식하지 않고도 발걸음 따라다니던 길이었지만 세월이 무상했다. 이정표 글씨를 놓치지 않고 읽으며 다니는 일은 피로도가 높았다.
소아 치과는 비명과 눈물이 끊이지는 않는 곳, 여름이는 검사와 상담만 하는 첫 진료이지만 징징 윙윙 기계음에 오열하는 아이들 목소리에 차분하기는 힘들었다. 여름은 미끄럼틀도 타고 구경도 하는데, 나는 목이 쉬도록 소리 지르며 치료받는 7번 의자 쪽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보호자 의자에 앉아 넋이 나간 엄마의 얼굴이 미래의 내 모습이 될까 싶어 지레 겁을 집어먹었다. 2층과 4층을 오가며 접수, 상담, 촬영, 진료를 마쳤다. 의사 선생님은 어금니가 곧 올라올 테니 6개월 후에 종합적으로 검사를 하고, 그때 교정을 진행하게 되리라 말했다. 8월로 진료 예약을 하고 나오니 마음이 편해졌다. 당장 치료를 진행하지 않아도 된다니 그나마 다행.
내 사랑 황떡을 먹으러 갔다. 동생과 또 친한 동생까지 모여 순한 맛 떡볶이와 만두, 어묵과 김빕을 실컷 먹었다. 어린이들은 삶은 달걀과 쿨피스를 먹었는데, 여름이 노른자를 다 남기는 바람에 떡볶이 국물에 의지해 노른자를 세 알 먹었다. 꺼지지 않은 배를 부여잡고 금호강가에 생긴 커다란 카페로 이동, 막내에게 커피와 빵을 얻어먹었다. 게임하고 영상 보는 어린이들에게 몇 번이나 조용히 하라고 혼쭐이 나면서 어른의 대화를 나누었다. 참, 사는 게 쉽지 않은데 유튜브 영상 소리보다 작게 속삭이려니 갑갑하네. 그래도 이렇게라도 반가운 애들과 놀 수 있는 게 또 어디냐 싶었던 시간이었다.
2월 5일 목요일
커튼을 사이에 두고 누워서 - 한의원
부러졌던 새끼손가락 때문에 한의원에 다니고 있다. 손마디 통증이 나으면 재활치료도 해볼까 하는데, 전에 어깨를 다쳤을 때 했던 도수치료가 너무 무서워서 일단 한의원에 먼저 갔다. 따뜻한 침대에 누워 찜질돌을 배에 올리면 눈이 스르르 감긴다. 잠이 들랑 말랑 할 때쯤 손가락에 침을 꽂고 빨간빛을 쪼인다. 출입구가 열릴 때마다 나오는 작은 별 선율, 찜질기 꺼지는 소리, 침대 안마기능 켜는 소리 들과 함께 멜론색 커튼 건너에 나란히 누워있는 환자 동지(?)들의 부상 사연과 치료 과정이 들린다.
지난주에는 동네친구 남편이 손목을 다쳐서 같은 시간에 진료를 받았다. 내가 침을 맞는 동안 오른쪽 커튼 건너에서 쿠-푸-하는 소리가 들려 웃음이 피식피식 나왔다. 다른 날 커튼 건너에는 팔과 어깨가 아픈 여자분이 왔는데, 어디가 어떤 식으로 아프냐는 한의사님의 질문에 "그냥 팔이 붙어 있는 그 자체가 아파요!"라고 대답했다. "아이고, 그거 큰일이네요." 하는 선생님 목소리에 속으로 맞장구를 쳤다. 침을 맞고 치료받는 동안에 이어지는 목소리에 꽤 강한 통증이 전해졌다. "처음의 통증이 10이라면 지금은 어느 정도인가요?" "지금은 5에서 6?" 하는 대답, 다행이었다. 그다음번 옆자리에 누운 젊은 여자분은 하루 종일 서서 일을 해서 골반과 다리가 아프다고 했다. 치료를 받고 쉬면 이틀 정도 괜찮지만, 또 일을 하니 제대로 나을 기회가 없다고 하니 안타까웠다.
오늘은 왼쪽 옆에 건장한 체격의 체육인 남자(보진 못했는데 선생님이 몸이 아주 좋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가 왔다. 어깨 수술, 허리와 목 등 아픈 곳이 많은 환자였다. 최근에는 자전거를 타다가 다쳐서 봄이 오기 전까지 치료를 받고 회복할 계획이라 했다. "운동도 하고 몸이 이렇게 좋은데 아픈 데가 많네요?" 선생님 질문에는 "건강한 만큼 많이 썼어요. 운동도 무리하게 하고 막노동도 많이 했어요." 몸이 약하면 조심하고 아끼느라 잘 다치지 않지만 힘이 세고 강한 몸을 가진 사람은 그만큼 무리하는 법이었다.
손가락에 침을 꽂은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서 소리가 나지 않는 푸디카메라로 찍었다. 한참 더 누워있고 싶었지만 치료시간은 금방 끝났다. 확연히 줄어든 통증(10에서 3 정도까지)이 낫고 나면 재활치료를 알아봐야겠다. 펴지지 않는 끝마디가 영원히 이럴 건지, 주먹을 꼭 쥐는 날이 올 때까지 악력기도 열심히 움켜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