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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Jan 28. 2023

우연과 운명과 기적과 기억

단어의 무게와 그림책 일기 둘

10월 27일 목요일

운명과 우연과 기적

 어제 모임에서 "기적을 믿나요"라는 질문에 돌아가면서 답하는 시간이 있었다. 기적을 믿는다는 사람, 기적 믿고 싶다는 사람, 살아있는 것이 이미 기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기적이란 단어의 어감이 너무 무겁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인생을 뒤흔들만한 사건이어야만 그런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또 단어 한 마디에 깊은 구덩이를 파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기적은 믿지 않지만 운명은 믿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일들은 운명적으로 일어나고야 마는 거라고, 나의 의지나 선택과는 상관이 없다고,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준비를 하든 말든 벌어질 일은 벌어진다고 여기면 마음이 덜 무겁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또 생각에 빠졌다. "운명"이라는 단어 역시 너무나 무겁다고. 내가 찾는 단어가 될 수 없겠다고 느꼈다.

 영화 "시리어스 맨"의 주인공은 자신의 의지에 반해서 일어나는 온갖 악재들에 몸서리치며 랍비를 찾아간다. 어떤 해답도 되지 않는 "운명을 받아들여라" 식의 대답을 늘어놓는 랍비를 향해 남자는 소리친다.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아요! 나는 답을 알고 싶다고요!!"

 나는 자주 시리어스 맨이 되었다. 답이 없고, 있다 해도 별 의미가 없는 질문에 빠져들어 스스로를 괴롭혔다. 정답이 있을 거야. 누군가의 잘못이야. 잘못이 시작된 점은 어디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에 지치지만 질문하기를 그치지 못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나는 요즘도 가끔 질문의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그럴 때 내 마음은 뭉크의 절규 같은 표정을 짓고 있겠지. 왜 그런 질문에 빠져드는 거야아아아아!!

 나는 기적이나 운명 따위 무거운 단어들을 내버려 두기로 했다. 기적을 믿냐는 물음에는 아니오로 대답했다. 모든 것은 우연이라고, 우연이라는 단어가 좋다고 했다.
"이런 힘든 일이 찾아오다니! 우연입니다. 좀 운이 나쁠 수 있죠. 와우! 이 행운은 기적일까요? 우연입니다. 이번에는 운이 참 좋았어요. 내 성격은 왜 이렇게 별난 거죠? 우연히 타고 난 성격이랍니다. 이유는 없어요."


 이런 식으로 우연과 친해지면서 조금쯤은 그러려니 할 수도 있게 되었다고 했다. 우연은 가능성이면서 위안이 되는 친구다.

오후 4시 달


1월 11일 수요일

"날개양품점"을 읽다가 떠오른 생각


아름다워라


 과거를 떠올리면 낯부끄러운 기억이 많은 게 당연하겠지만, 나는 학원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시절이 통째로 후회스럽다. 부정적인 성격에 비해 후회는 적은 편이었다. 처음부터 긍정적 전망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좋지 않게 마무리된 일이라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시 돌아가도 그 모양 그 꼴이었을 거야.라고 스스로를 한껏 낮추곤 했다.


 작년쯤부터 이런 성격에 의문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 정말 그때가 그만두었어야 할 시점이었잖아?"부터 "거기서 일하기로 한 결정 자체라 틀렸던 거구나." 했다가 더 파고들어

"이 정도 직장에서 나를 받아주는 것만으로 만족했구나."


 끝내는 이래버렸다. "면접은 너무 힘들어. 이 정도면 된 것 같아. 찝찝하다고? 아니야. 또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거야. 내가 뭔데 자꾸 판단해? 너 뭐라도 되니?"


 이렇게 자신을 다그치고 몰아붙이며 엉망진창 직장 생활을 이어간 것이다. 한두 달 놀면서 여유롭게 찾아도 굶어 죽지는 않았을 텐데, 죽어도 부모님에게 돈 좀 달라는 말을 못 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단 한 번도 되고 싶지 않던, 공무원 공부할 거면 뒷바라지해 주겠단 말을 반복하던 부모님이 떠올라 갑자기 또 화가 나네?)


 여러 학원이 있었다. 완전 쓰레기 같은 학원, 더 쓰레기 같은 원장, 무책임한 학원, 미래가 없는 학원... 등등... 나는 면접을 보고 보통 나 좋다는 곳에서 바로 일을 했다. 일을 잠깐이라도 쉬면 무서웠다. 마냥 열심히 일해서 원장들은 다 나를 좋아했다.(나를 너무 좋아한 원장 이야기는 다음에...) 요즘은 하루 한두 시간만 수업을 해도 기력이 달리는데, 그때는 어려서인지... 다섯 시간씩 큰 소리로 잘만 떠들어댔다. 수업의 질은 들쑥날쑥 이었고 가끔은 엉망진창이었지만, 수업의 질을 따지는 원장은 없었다. 그저 학부모 상담이나 싹싹하게 잘하고,

중간 기말 점수만 잘 나오면 그만이었으니까.


 주 7일 동안 일을 한 기간도 제법 길었다. 피곤하니까 택시 타고 열받으니까 술 마시느라 돈은 못 모았다. 결혼이 결정되자마자 일을 때려치웠는데, 주부가 되면 풀타임 학원 강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정말 좋았다. 결혼 후에는 지금까지 과외 수업만 한다. 1:1로 만나면 아이들은 대부분 평범하고 솔직하다. 예전과는 달리 어머니들도 전화 통화 대신 카톡으로 소통하는 걸 편하게 느껴서 그 점도 좋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학원 원장이 없다는 거다. 물론 내가 일을 그만두고 한참 후에도 다시 나를 찾는 학부모와 학생, 괜찮았던 원장님도 있었다. 하지만 입시학원 강사로 일하는 건 정말 별로였다. 원장도 학생들도 나를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만만한 존재로 여긴다는 점이 끔찍했다. 그런 하찮은 취급을 자꾸 받다 보니 안 그래도 스스로 쪼그라들어있는 내가 나를 더욱 다그치게 된 모양이었다.


 나는 다른 직장 생활을 해 본 적이 없지만, 하하 호호 출근하고 싶은 그런 직장이 없다는 것 정도는 잘 아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20대의 나에게 한 마디라도 전할 수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싫다고 느끼는 그거, 그 느낌이 맞아. 술 마시러 가지 말고, 당장 거기 그만둬."





1월 13일 금요일​


전광판과 눈, 물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작년부터 광고판이 붙었다. 종이도 거울도 아닌 전광판이다. 엘리베이터에 타서 문을 바라보면 왼쪽 상단에 스케치북보다 커다란 전광판이 번쩍인다. 맥도널드, 숙취해소 음료, 다이어트 회사, 피부관리 기기의 광고가 쉴 새 없이 번쩍인다. 소리는 들리지 않으니 다행이라 해야 하나. 아래쪽에는 포털사이트 메인 페이지처럼 헤드라인 기사가 줄줄이 쓰여있다.


 의도적으로 반대쪽 구석에 서서 멍 때리기를 하는데, 화면이 거울에도 비치니까 광고 영상을 피하기가 어렵다. 왜 내가 이 짧은 이동 시간 동안 편안하고 느긋할 수 없게 되었나. 화가 났다. 영드 "블랙미러"에서 성공한 사람이 아니면 온 세상 어디에서도 광고판을 피할 수 없는(심지어 내 방에서조차) 세상을 보고 무섭고 끔찍했던 기억마저 떠올랐다.


 처음부터 싫었던 전광판이지만 점점 더 싫다. 여름이가 전광판에 바로 눈길을 빼앗길 때는 화가 난다. 등원 전 엘리베이터에서 사진을 찍으면 여름이는 광고를 보느라 눈동자가 위로 한껏 올라가 있다. 며칠 전에도 "엄마,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싸워? 죽었어?" 라기에 놀라서 화면을 돌아보니 숙취해소 음료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회식으로 과음하는 상황을 남자 둘이 전쟁터에서 소리치는 장면으로 웃기게 연기하는 내용이었다. 하하... 구려. "그냥 저건 장난치는 거야." 다행히 금세 1층이었다.


 허리가 한 줌인 여성이 다이어트 프로그램을 광고하고, 성공한 사람이 인생을 바꾸라며 또 다이어트 약을 광고하고, 어려 보이는 피부를 가지라고 어린 여자 연예인이 괴상한 마스크를 광고한다. 꼴도 보기 싫다. 대충 그러려니 할 수도 있다. 못할 건 뭔가. 그래도 화가 난다. 좋은 것만 보고 살 순 없지만 억지로 이따위 화면을 봐야 한다는 게 불쾌하기 짝이 없다.


 전광판을 달면 아파트에 돈이 들어온다고 한다. 내가 싫다고 한다고 사라질 전광판이 아니다. 이웃 아파트에도 얼마 전부터 전광판이 생겼다는 걸 보니, 점점 늘면 늘었지 줄어들진 않겠지. 아무런 감흥 없이 마구 떠들어대는 광고판은 징그럽다.


"눈, 물"을 읽으면 시끄럽고 번잡한 이 세상이 싫어진다. 눈물이 나고 억장이 무너진다. 하지만 꼭 안아주고 싶고 다시 펼쳐보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전광판에는 다시 보고 싶은 이야기 따위는 나오지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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