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에서 보내는 날은 언제나 즐겁지만 오늘은 특히나 더 보람찬 날이었다. 오전에는 알찬 북클럽이 있었고 오후에는 그림을 그려주는 이벤트를 했다. 지난주 정민님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콜! 을 외치고 "귀여운 내 얼굴"이라는 깜찍한 제목으로 작은 초상화를 그려드리기로 했다. 미리 주문받은 두 장은 집에서 그려갔고, 낯익은 분들과 탁자에 둘러앉아 그림을 그렸다. 얼굴을 닮게 그리지 않는데도 자꾸만 눈이 마주친다. 꼭 닮은 묘사를 하지 못하지만, 상대를 많이 쳐다볼수록 그림에 닮은 기운(?) 비슷한 느낌이 들어갈까 싶어 자꾸 눈을 맞추게 된다.
그러고 보면 돈을 받고 그림을 그려준 작업도 처음이지만, 바로 앞에 앉은 사람을 유심히 보며 그리는 경험도 처음이다. 좋았다. 그림이 그려지는 과정을 유심히 봐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좋았다. 마음에 들어 하려나, 너무 안 닮았나? 이 색은 어떠려나, 여백이 많은가? 고민들이 스쳐가면서도 큰 실수 없이 완성할 수 있어 다행이었고.
집에 와서 바쁘게 여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가 장터에 가서 이것저것 사 왔다. 도넛과 딸기, 떡볶이와 어묵으로 저녁을 먹고 일찍 여름이를 재웠다. 새로 받은 약이 잘 듣는지 잔기침 없이 잘 자는 여름이.
초저녁에 두 시간을 자는 바람에 첫눈을 놓쳤다. 눈을 못 본 아쉬움에 잠이 확 달아나버려 늦게까지 그림을 그리고 일기를 써본다. 그림을 그리는 나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
내 엽서들
12월 14일 수요일
난로와 그림책
내 주변 세상에는 싫어하는 것이 넘치도록 가득했는데, 이제는 견딜만해진 것들과 한 뼘 더 나아가 좋아하게 된 것들이 얼마나 많아졌는지 문득 깨닫는 날이 있다. 어제 초상화를 그려주면서부터 마음속에 차오르던 따뜻하고 달콤한 무언가가 오늘 난로 앞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난롯가에 둘러앉은 사람들과 달달한 것과 짭짤한 것, 말캉한 것과 바삭한 것을 나눠 먹으며 겨울 그림책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젯밤 놓친 첫눈을 골목길에 세워둔 모르는 사람의 차에서 만났다. 아직 와이퍼가 닦아내지 않은 앞유리에 하얀 눈이 네모반듯하게 앉아 있었다. 시린 손끝으로 하트를 그렸다. 밤사이 얼어붙은 눈이 사그락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찔렀지만 하트는 둥그스름하게 잘 그려졌다.
골목 맞은편에서 찬바람이 진짜 겨울을 알리며 달려들었는데, 순간 달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쥐포와 그림책이 들어있는 가방을 꼭 잡고 책방까지 달려갔다. 책방의 동그랗게 노란 불빛이 밤에 보는 불빛처럼 따뜻했다. 난로 위에 놓인 귤이 달큼한 냄새를 풍기고, 반가운 얼굴들이 가득한 공간. 이렇게 나는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가는구나. 겨울이면 더 향기로운 커피와 겨울에만 마실 수 있는 핫초코, 겨울에 더 맛있는 칼국수와 수제비와 우동 그릇에서 폴폴 올라오는 하얀 김. 겨울에는 온기를 마음껏 그리워할 수 있구나.
미식 이야기로 마무리한 조개구이와 석화 생각에 배불러도 배고픈 기분이 드는 밤, 난로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겨울은 내가 손을 뻗어서 온기를 끌어올 수 있는 계절이라는 윤 님의 말을 기억하려 한다.
난로와 그림책
12월 15일 목요일
재수종합반 기숙학원에서 풀려난(?) 옛 제자 현이를 만났다. 현이의 누나 진이가 중학생일 때 처음 만난 인연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늘 야무지던 진이는 초등 임용 1차에 합격했다고 하고, 현이도 고등학교 시절 대차게 놀았던 만큼 재수 학원에서 알차게 공부했는지 수능을 잘 보았다 했다. 그래서 나는 현이와 웃는 얼굴로 만나 누룽지 백숙을 먹을 수 있었다. 한결 같이 멋을 부리는 청년(이라기엔 웃기지만)이 된 현이는 어찌나 날씬하고 생생한지, 나도 모르게 부럽구나, 소리가 나왔다.
어린 나이에 겪는 실패는 아이를 훌쩍 성장하게 하는구나. 외부와 단절된 채 도 닦듯이 공부만 하는 생활로 현이는 더욱 단단하고 자신감 있는 아이가 되어있었다. 이런 성장을 경험하려면 물론 걱정 없이 공부와 꿈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현이는 가족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부모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믿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현이와 가족들은 서로에게 최선의 존재라는 든든한 소속감을 느끼는 듯했다. 내 나이 반토막 풋풋한 어린아이를 보며 마음속 깊이 부러움의 감정이 일렁이는 순간이었다.
사고뭉치가 되어 헤어졌던 중3의 현이, 시험을 망치고 다시 만난 고1의 현이, 방황을 온몸으로 겪어내던 고2, 고3 시절의 현이를 떠올렸다. 아, 그때는 참 정신이 없었어.라고 말하자
'그때는 정말 정신이 나갔었죠.' 하고 같이 웃었다.
카페모카와 뱅쇼를 마시면서 수다를 떨고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대학 합격 결과가 나오면 또 만나자고 했다. 3시가 되어 현이는 친구를 만나러 가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바람이 찼다. 피곤하면서도 즐거웠다.
그나저나 스무 살이 된 남자아이가 담배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는 거냐. 현아, 고생하기 전에 어서 끊으렴. 물론 이런 말은 듣지 않겠지. 정신 차리고 공부하라고 했을 때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날의 그림일기
12월 16일 금요일
'천천히, 스미는'
번개 북클럽 멤버들과 한 달 반 동안 함께 책을 읽었다. 하루에 산문 한 편을 읽고 그중에서 딱! 한 문장만 필사해서 공유하는 방식의 책 읽기였다. 처음에는 그저 흰 종이에 쓰기 시작했는데 멤버들의 알록달록한 메모지가 부러워져서, 나도 귀여운 메모지를 찾아 썼다.
짧은 글이지만 하루 종일 여운이 남는 구절도 있었고, 웃음이 터지거나 코가 시큰거리는 페이지도 있었다. 가끔은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도 있었지만, 몇 번이고 다시 읽게 되는 문장도 만났다. 글의 숫자만큼 나의 메모가 붙어있는 산문집이 되어 특별히 더 소중한 책이 된, 하나뿐인 나의 '천천히, 스미는'
멤버들과 나눈 이야기들이 다 좋았다. 뚜렷하게 느끼면서도 입 밖으로 꺼내 말하지 못하는 문제들을 짚어준 분들과 소중한 자신의 추억과 이야기를 들려주는 분들이 고마웠다. 산만하게 펼쳐지는 나의 말을 듣고 웃어주신 분들도 참 고마웠다.
우리들의 삶에 천천히 스미는 것들을 다시 써 본다.
하루를 정리하는 산책과 책 읽기, 곱게 나이 들기, 과정에서 의미를 찾기, 새 가족이 된 반려동물, 정성 들여 익히는 좋은 습관,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 천천히 스며들듯 붙는 살과 거부할 수 없는 집안 살림살이, 그리고 익숙하게 스며드는 외로움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