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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Apr 01. 2023

방문밖에 뭐가 있든

그림책 "문밖에 사자가 있다"를 읽고


 엄마가 수술 회복기의 요양을 겸해 2박 3일간 머물고 돌아간 3월 초 새벽에 잠시 깼을 때, ‘엄마가 옆방에서 자겠지?’ ‘아, 어제 갔지.’ 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창밖이 밝아져 깨어날 때 ‘거실에서 엄마가 티브이를 보나?’ ‘엄마는 어제 갔지. 다행이다.’ 했다. 집에 엄마가 없다는 사실에 이토록 안도할 일인가 싶어 속상하면서도 솔직한 평온의 안도감이 푸근했다. 사흘째 되던 날, 엄마를 시골집에 데려다주고 바쁘게 돌아오다가 길가에서 만난 산수유가 사랑스러워 천천히 운전했다. 더울 정도로 따뜻한 햇볕에 기분이 좋아져 집에 와서는 끼니도 거르고 청소하고 긴 산책까지 했다.

 

 그다음 주에도 문중 행사를 피하느라 엄마가 다시 우리 집에 왔다. 몸이 좀 나아진 엄마를 데리고 내 친구와 셋이서 밥을 먹고 커피도 마셨다. 내가 문간방에서 수업하는 동안 엄마는 여름이를 데리고 놀이터와 문방구에 다녀왔다. 시골에 데려다 주기로 한 여동생과 엄마가 금오산 브런치 카페에 갈 때, 나는 먼저 차에서 내렸다. 그림책 모임을 하러 책방에 달려가는 걸음이 어찌나 가볍던지!

 

 엄마와 내가 서로의 손님이 된 지도 제법 긴 시간이 흘렀다. 닮은 점도 많지만 참 맞지 않는 모녀인 우리 사이는 여동생이 채워준다. 시골집에 갈 때는 거의 여동생이 함께 있지만, 우리 집에는 남편이 있으니 모두 모여 북적이기는 쉽지 않다. 엄마가 거실에서 옛날 드라마 ‘하늘이시여’를 보고, 남편이 안방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던 오후에 나는 여름이 방에 들어가 누워버렸다.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셨는데도 끝없이 하품이 나고 나른했다. 아플 때가 아니면 낮잠은 안 자는데 그날은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내 문밖에는 커다란 사자가 둘이나 있었으니까.


 남편은 휴무일이니 편히 쉬고 싶을 테고, 엄마도 손녀가 오기 전에 소파에서 느긋하게 쉬면 그만인데 나는 괜히 식탁에 앉아서 마음만 분주했다. ‘뭐라도 말을 좀 해야 하나? 과일이라도 권해야 하나?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 그러다가 내가 왜 그래야 하나, 괜한 의무감에 불쑥 심통이 나서 방에 들어가 누운 것이다. 그래봤자 한 시간도 채 못 자고 언제나 나를 일으키는 힘이 센 아기 사자를 데리러 나갔지만 말이다.


 국어 문제집에 나오던 오정희 작가의 단편 <소음공해>의 구절이 자꾸 떠올랐다.

“가족들이 집에 있을 때는 아무리 거실이나 방에 혼자 있어도 혼자 있다는 기분을 갖기 어려웠다. 사방 문 열린 방에서 두 손 모아 쥐고 전전긍긍 24시간 대기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수업을 하며 수십 번도 더 읽은 문장이었다. ‘전전긍긍’씩이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던 미혼 시절에는 몰랐지. 내가 지금처럼 전전긍긍을 넘어 안절부절못하게 될 줄은.


 제 밥은 알아서 챙겨 먹는 남편들도 많다는데 아무튼 내 남편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 배달과 냉동으로 차리는 허술한 밥상이라도 몽땅 내 일거리(그 외 나머지 집안일도 당연한 듯 내가…. 쓰다 보면 화가 나니까 일단은 접어둔다)이다. 집에 같이 있는 남편이 내 얼굴을 한 번 더 보려고 나를 찾을 리는 없고, 이름을 불러서 가보면 늘 일거리를 내놓는다. 간식이 있느냐, 까만 바지가 없어졌다, 양말을 주문해 달라. 자잘하고 성가시지만 거절할 도리도 없는 요구사항들이 끊임없이 나를 초조하게 만든다.


 남편이 회식하고 늦게 들어오는 날이 좋다. 남편의 저녁을 챙기지 않아도 되어서, 나의 온라인 모임 시간에 관해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편하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노트북 앞에 앉아 있으면 자꾸 기웃거리는 남편이 몹시 불편하다. 쓰고 있는 문장이 대체로 이 글처럼 ‘혼자 있고 싶다’라는 내용이 많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어떤 밤에는 방문 밖으로 나가기 싫어 자는 척하며 잠든 아이의 발치 방향에서 최소음량으로 영화를 본다. 아이가 잠들면 나도 편안하게 큰 화면으로 영화를 보고 싶지만, 오락가락하며 몰입을 방해하는 사자가 안방에 있으니까. 작은 소리에 집중해 자막을 읽으며 작디작은 화면으로 영상을 보는 편이 즐겁다.

 

 내 집에 있어도 나를 찾는 이들, 내 손이 필요한 이들이 방문 밖에 있을 때 나는 끝없이 불안해진다. 웅크린 노랑이처럼 심장이 쿵쿵거린다. 파랑이처럼 용기를 내 사자에게 먹을거리를 던져주고 잠깐의 탈출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고작 한두 시간의 불편한 자유를 공들여 준비하는 게 더 구차하게 느껴진다. 어쩔 수 없이 유치원에서 주는 시간 안에 한정된 자유를 누리고 다시 문 안으로 돌아오는 수밖에.


 3월이 끝나는 오늘, 문밖에는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겨우내 간절한 기다림이 끝났는데 이상하리만치 꽃놀이에 설레지 않는 날들이다. 올해는 가을 대신 봄을 타는 모양이라 여기고 싶다. 내일 꽃놀이에 아기 사자를 데리고 가야 해서 울적한 건 아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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