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매일 보는 사람 앞이 아니어도 언제든지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몇 해째 꾸준히 만나는 정수기 관리 선생님 앞에서도 나는 그림을 그렸다. 선생님과 나는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서 이제 가족관계까지 대충 알게 되었는데, 두세 달에 한 번씩 만나면서도 이상하게 시시콜콜 이야기를 하게 된다. 잘 모르지만 좋은 분이다. 일처리가 정확하고 솔직한 느낌이 든다.
그날도 선생님은 필터를 교환하고 이것저것 분주하게 움직이는데, 그동안 나는 식탁에 펼쳐 놓은 그림일기에 색칠을 했다. 전에 문구사를 하셨다는 이야기가 흥미로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고, 엄마들의 아들 사랑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점검이 끝나 내 서명을 받느라 식탁을 본 선생님이 말했다.
"고객님~ 그림도 그리네요? 재주가 많다! 집에 있어도 늘 바쁘네요!"
"아니에요! 돈 되는 일도 아닌데요, 뭐~"
대답하면서도 아차! 싶었다. 칭찬은 칭찬인데, 뭐라 또 혼자 쪼그라들고 그러는지... 멋쩍어서 웃음이 나왔다.
"아이고~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닌데~!"
"알아요. 저도 모르게 고민하던 게 튀어나왔네요~"
아무튼 선생님과 나는 하하 웃으며 다음 점검 날을 잡았다.
노는 일과 좋아하는 일로 가득가득 찬 나의 일상은 즐겁다. 자라나는 아이와 통장잔고를 보면 어쨌든 돈을 좀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떠오른다. 지난주에는 당근마켓에 과외 광고를 다시 올렸고, 오늘은 지원 사업 신청서를 냈다. 카페에서 그림을 그리려면 커피값이라도 벌어야겠다 싶었다. 이런저런 불편함이 있더라도 좀 감수할 일이 아닌가 하는 판단이 들었다.
하고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과 할 일을 메모장에 써보았다. 지금 하고 있는 북클럽을 더 착실히 운영하고, 다음 달부터는 도서관에서 그림책 만들기 수업을 듣는다. 동생과 협업(?)으로 그림도 그리고 싶고 그림일기와 운동도 꾸준히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배달 음식 작작 먹고, 책은 좀 그만 사고...!
"사놓고 안 읽은 책들의 사연"으로 라방을 해야겠다. 부디 누가 좀 같이 읽어주길 바라며(친구들에게 보여주었더니, 영 반응이 심드렁하군)
이렇게 쌓아보니 더욱 걱정
5월 26일ㅡ땡볕 아래 산책
산책은 늘 좋다. 도서관에서 그림책 수업을 듣고 상점 루꼴라에서 샐러드를 찾아 걸어왔다. 해가 쨍쨍한 오후 2시, 28도의 기온은 걷기에 쾌적하지 않지만 그래도 충분히 걸을 만하다. 곧 무더위가 시작되기 전에 걸어두자는 마음으로 씩씩하게 걸었다.
몇 년 전부터 이 계절이면 큰길가에 금계국이 활짝 핀다. 눈이 부시도록 샛노란 꽃잎들이다. 뙤약볕 아래에서도 지치지 않고 생기발랄한 꽃들을 보는 기쁨. 그리고 금계국 사진은 하나도 찍지 않아 갤러리를 열고 당황하고 있네.
여린 초록의 계절은 지나갔고 이제는 이파리들이 씩씩하게 펼쳐지는 시기이다. 은행나무와 연두색 잎이 둥글게 말리는 산수유나무 외에는 특징을 눈에 익히지 못한 나무들이 가지와 잎을 쭉쭉 뻗어나간다. 지난 산책의 기억에 의지해 '여기는 이팝나무, 이것은 무슨 참나무더라.' 할 뿐이다. 매해, 매 순간 그러면서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본다.
홍조팝과 둥굴레
부드러운 색의 푸른 하늘에는 어김없이 초록 잎이 있다. 지난주에 새로 발견한 산책로(화요 장터 근처 아파트 둘레길)가 마음에 쏙 들어, 햇빛도 피할 겸 일부러 둘러서 걸어 들어왔다. 마침 신호등도 딱 맞게 바뀌어주어서 좋아하는 나무계단 길도 지나왔다. 아파트만 보이는 동네 풍경에 싫증을 내며 살아가지만, 이런 귀퉁이들이 있어서 정을 붙이기도 한다.
아주 작지만 내가 들여다볼 숲은 충분하다. 이름을 모르고도 이렇게 반가운 초록과 연두가 있으니까. 그리고 온갖 장소에 장미가 피어난다. 담벼락에 붙어 심어둔 장미 줄기가 나무 쪽으로 마구 뻗어나가는 모습이 좋았다.
ㅡㅡㅡ
5월 27일ㅡ저녁놀이터에서
저녁밥을 일찍 챙겨 먹고 놀이터에 나왔다. 평소 놀던 아이 친구들은 이미 들어갔지만, 늘 눈인사를 주고받는 일행들이 매일 앉는 벤치에 모여있었다. 같이 놀 친구가 있다는 반가움에 여름이는 킥보드를 쌩쌩 달려 편의점으로 갔다. 자갈치 한 봉지를 골라 친구들에게 뛰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벤치에 앉았다. 한참 조용하다 싶어 놀이터를 둘러보니 초등학생 언니들 곁에 어린아이들과 부모님들이 둥그렇게 서 있었다. 과자봉지를 뜯어줘야겠다 싶어 다가가보니, 여학생 하나가 까진 무릎을 내놓고 울먹이고 있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아프겠다" "피가 나" 하며 말을 보태고, 어른들은 부모님이 언제 오시는지, 전화해서 약이 있는지도 물어보라 하고 있었다. 여학생의 친구는 커다란 방수 밴드를 만지작거리며 붙여도 될지 망설이고 있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항상 적극적이고 아이들과 재미있게 노는 아저씨가 물병을 들고 왔다. 상처에 묻은 모래를 씻어내야 한다고 하니 다친 아이는 잔뜩 겁을 먹었다. 밴드를 들고 있던 친구가 "용기를 진짜 많이 낸 거야." 하며 격려하고 물병 주인인 유치원생은 "이거 내 물이야." 하며 철없는 귀여움을 뽐냈다. 뭐 대단한 구경이 났다고 그 사이에 끼어 자갈치를 들고 서서 구경하는 여름이를 몇 번이나 불러냈지만,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 호기심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드디어 아이가 과자봉지를 뜯어 왔다 갔다 한다. 친구에게 자갈치를 나눠주고 어슬렁대길래 "엄마도 한 개만" 했더니, 세상 시무룩한 표정, 서운하다. 내 포카칩이라도 하나 사 올까.
시골에 살 때 넘어져서 무릎에서 피가 나면 모래를 발라서 대충피를 말리고 뛰어놀았었는데... 아득한 "나 때는 말이야"가 떠올랐다. 그것만이 확실한 이유는 아니겠지만, 오랫동안 유난히 허옇고 까만 무릎이 어린 시절에 상처를 깨끗하게 관리하지 않은 탓이었다고 믿었다. 여기까지 쓰고 벤치를 보니, 여학생들은 자리를 뜨고 없다. 요즘 나오는 습윤밴드를 바르면 흉터는 금세 낫겠지. 오늘 집에 가면 엄마 아빠에게 실컷 어리광을 부릴 수 있겠지. 괜히 혼나지는 않겠지. 그리고 또다시 내 옆에 와서 자갈치를 하나도 나눠주지 않는 여름이, 몇 시에 집에 가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