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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Feb 03. 2023

떠나온 금호강

금호강과 아양교


태풍이 지나간 후, 강물이 많이 불었다. 2단으로 된 강둑의 아래쪽 한 단이 완전히 잠길 정도였다. 비가 그친 연푸른색 하늘이 그림처럼 아름답던 늦여름 주말 오후였다. 고1 때부터 친한 친구가 다리를 건너 우리 동네에 놀러 왔다. 아마 20대 중반쯤이었지 싶다. 우리는 갈 곳이 없을 때 강가에 내려가곤 했다. 운동 시설이 있는 왼쪽으로 가는 날도 있고, 조용하고 인적이 드문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날도 있었다. 강물에 계단이 다 잠긴 걸 보고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이 일어난 우리는 오른쪽으로 걸었다.


 4차선 도로이기도 한 다리 위에는 차가 쌩쌩 다니고, 다리를 건너면 지하철역이 있었다. 어느 곳이든 사람이 북적일 시간이었지만 강둑은 고요했다. 흙탕물이 넘실거리는 강물을 옆에 두고 천천히 걸었다. 10분쯤 걸었을까, 길이 끊겼다. 강물이 산책로까지 올라와 있었다. 길이 끊어진 딱 그 지점에는 냉장고가 놓여 있었다. 누군가 강둑에 버리고 간 냉장고가 태풍에 휩쓸려 거기까지 왔던 걸까? 하얀 냉장고는 바닥 모서리 부분만 살짝 물에 잠긴 채 커다란 두부처럼 누워있었다. 무성한 환삼덩굴이 냉장고 아래 깔려 있었다.


 우리가 올라가는 정도로는 흔들리지 않겠다 싶어 나와 친구는 냉장고 위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슨 이야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평소처럼 연예인과 만화 이야기,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과 신세 한탄을 나누었겠지만,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집이 지척이지만 쪽배를 타고 강 위에 뜬 듯 비현실적인 공간에 뚝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바로 아래 계단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탁한 미숫가루 같은 물 위에 부러진 나뭇가지와 쓰레기가 흘러갔다. 강 저편으로 갈수록 황토색 흙탕물은 옅어지고 시퍼런 물빛이 살아나고 있었다. 간간이 바람이 불고 말소리가 끊어지면 물소리가 크게 들렸다.


"나중에 이 동네를 떠나 살면 여기를 그리워하겠지?"

"너 정말 할머니처럼 말했다, 방금."

"그럴 것 같아. 이 동네에 산 지 10년쯤 됐는데 처음에는 진짜 별로였거든. 근데 이제 여기 떠나서 사는 게 상상이 안 된다."

"20대의 말이 아닌데?"

우리는 킥킥 웃었다. 웃다가 문득 줄지 않고 넘실대는 물이 무서워져서 냉장고에서 내려와 집 쪽으로 걸었다.


 처음 동구로 이사를 온 겨울, 중학생이던 나는 매일 다리를 달려서 건넜다. 성수대교 붕괴의 충격을 잊지 못해 긴 다리를 건너는 게 매번 무서웠다. 일단 최대한 힘을 내서 달리다가 다리 가운데쯤 가면 더 이상 뛸 힘도 없고 거센 바람에 얼굴이 따가워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사다리가 연결된 교량 유지시설이 있었는데 거기 서면 잠시 강풍을 피할 수 있었다. 숨을 한 번 고르고 다시 전력 질주를 하면 끝나는 아양교는 230m였다.

15년 전에 찍었던 동촌구름다리

 그 무렵 금호 강변에는 줄지어 있던 포장마차가 사라지고 공원과 산책로가 만들어졌다. 나와 동생들은 강변에서 자주 놀았다. 체육공원에는 철봉과 평행봉, 그네가 있었고 봄이면 새로 심은 개나리와 벚꽃이 화사하게 피었다. 학교 소풍으로 강 건너 유원지에 가기도 하고, 여름이면 강에서 조정 연습을 하는 고등학생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보이던 텐트촌이 예전 포장마차가 있던 자리를 채웠던 IMF 시절에는 강변에 내려가지 않았다. 수능이 끝나고 강가가 조용해졌을 때부터 다시 강변에 내려갔다. 어느 겨울 아침 동생과 나갔다가 버려진 뽑기 통의 잔해(아마 누가 훔쳐 와 동전을 빼고 버린 듯한)를 발견한 날이 기억난다. 우리는 혹시 누가 볼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달걀 모양 플라스틱 통을 잔뜩 주워 주머니마다 가득 채웠다. 집으로 돌아와 열어보니 조악한 머리 끈과 반지 따위가 들어 있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대학에 진학했다. 늘 집보다 밖이 좋았던 나는 많이 걸었다. 수업이 끝나고 만날 사람이 없으면 집까지 한 시간이 넘는 길을 걸었다. 번잡한 학교 앞을 지나 오거리부터 이어지는 오르막을 넘고 공항교를 건너면 한적한 강변길을 걸을 수 있었다. 봄이면 꽃이 화사하고 가을이면 벚나무 단풍이 아름다운 그 길. 마음을 때리는 듯한 음악을 들으면서 한 번도 글자가 되지 못한 공상에 빠져들었다. 미움과 슬픔에 잠겨 걷다가 순간 반짝이는 깨달음을 얻을 때도 있었고, 다리가 아파 한참을 계단에 앉아 있을 때도 많았다.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꺼내 외로워하며 누군가를 그리워하기도 했다. 때로는 친구와 긴 산책을 하며 마음을 나누고, 지금의 우울과 앞날의 희망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20대가 끝날 무렵, 지하철역이 있는 강 건너 동네로 이사를 하고 나서는 강변에서 조금 멀어졌지만, 금호강과 아양교는 언제까지나 우리 동네였다.


 결혼해서 살게 된 구미 동네에도 강이 있었다. 폭이 좁은 물이 졸졸 흘러 강이라기보다는 큰 개울 같았다. 신혼이었지만 남편과 싸우거나 홀로 서운하기만 한 날들이 이어졌다. 바쁘고 무심한 남편과 부딪혀 마음속 깊은 곳에서 후회와 슬픔이 밀려올 때, 우는 것에도 지쳐 산책을 나섰다. 개나리가 핀 봄날이었다.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강가에 내려가 보았다. 이어폰을 끼고 그냥 걸었다. 화창한 토요일 낮이었는데도 인적이 드물었다. 강 건너는 온통 공장이었고 이쪽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아파트뿐이었다. 여기는 금호강이 아니구나. 10년 전 내가 했던 말 그대로, 나는 금호강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2시간 정도 걷는 동안 마주친 사람은 자전거를 타는 아이와 아빠뿐이었다. 피곤하기도 하고 어쩐지 무섭기도 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긴 산책로에 어쩜 벚나무도 한 그루뿐인지, 지금쯤 동촌유원지와 강변에는 벚꽃이 흐드러졌을 텐데….


 강을 함께 걷던 친구가 그리웠지만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 시점부터인가 우리는 서로의 불행한 상황만을 공유했고, 아픔을 나눌 때만 친밀했다. 연애가 잘 풀리면 서로를 찾지 않았고 실연하면 절친이 되는 식이었다. 둘 다 연애가 잘 풀리지 않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끈끈했던 우리 사이는 내가 서둘러 결혼을 결정하고부터 어색해졌다. 결혼을 하고 내가 연락할 때마다 친구는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초보운전자인 내가 자동차 사고를 낸 후에 남편과 크게 싸웠다는 메시지를 보냈을 때 친구의 답장은 이랬다. '알콩달콩 재미있게 사네~'


 2년쯤 지나 친구는 자신의 결혼 소식을 알리러 나를 만나러 왔고, 나는 결혼식에 다녀왔다. 그걸로 끝이었다. 두세 번 정도 메시지를 주고받았지만 더 이상 우리는 친한 친구 사이가 아니었다. SNS 친구조차 아닌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도 잘 모른다. 금호강 언저리를 떠나 경남으로 이사했다는 친구는 아마도 잘 지내겠지. 금호강의 풍경들이 나 없이도 여전히 아름답듯이, 그때는 작고 귀여웠던 벚나무들이 풍성한 꽃비를 내릴 만큼 자라 꽃놀이 명소가 되었듯이. 괜찮지 않다고 울며불며 지내던 내가 구미에 정을 붙이고 잘 살듯이 말이다.


15년 전의 노을


#기대어씁니다6기

#나의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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