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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Feb 11. 2023

진짜 중요한 건

나의 몸 이야기


기대어씁니다 6기

과제로 쓴 글입니다.


그 때 그 시절 메리♡

 좋아하지 않아도 오래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영화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에서 주인공 메리(캐머런 디아즈)가 거울을 보며 자기 가슴을 빤히 보는 장면이다. 몸에 착 붙는 빨간색 옷 아래에서 움직이는 메리의 가슴. 만세 할 때의 가슴은 22살, 팔을 내리면 28살. 그 장면을 보던 나는 스무 살 쯤이어서 가슴이 처지는 안타까움 같은 건 몰랐다. 그저 스물둘, 스물여덟! 하며 한숨짓는 캐머런 디아즈가 지나치게 예쁘다는 감상뿐이었다. 사랑스러운 얼굴, 앙증맞고 귀여운 가슴에서 잘록한 허리로 이어지는 라인과 '늘씬함' 정도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답고 긴 다리.


  그 시절 캐머런 디아즈는 섹시하고 사랑스러운 여자 사람의 대표였다. 지금이야 미디어에서 만들어내는 왜곡된 미의식이나 남성 기준의 섹슈얼한 몸의 이미지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지만, 어릴 때는 그런 생각 자체를 못했다. 잡지와 영화에 나오는 여자들처럼 될 수만 있다면 어떨까? 군살 없이 늘씬하면서도 가슴과 엉덩이는 봉긋한 몸을 가진 쟤들은 거울만 봐도 행복하겠지?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메리처럼. 그러나 그런 몸은 말 그대로 꿈이다. 나의 강동원 님이 결코 나의 현실이 될 수 없듯이 말이다.


  스무 살 때, 아침에 집을 나서는데 앞집에서 공사를 하고 있었다. 마침 쉬는 시간이었던지, 내가 대문 밖을 나설 때 인부들은 담배를 피우며 바닥에 앉아 있었다. 무심결에 마주친 눈빛이 더러웠다. 입꼬리가 씰룩대며 웃고 있었다. 나에게 무언가 말을 하며 웃었는데 이어폰을 끼고 있어 듣지 못한 것이 행운이었을 게다. 아저씨들의 시선은 내 가슴에 머물러 있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가방을 추켜 매었다. 모퉁이를 돌도록 끝까지 내 몸을 쳐다보고 있었겠지. 나는 테디베어가 크게 그려진 흰색 맨투맨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이게 가슴이 커 보이나? 옷이 작나? 가슴 부분이 끼이나?'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금은 잘 안다. 내가 불편한 시선을 느꼈지만, 상대에게 대응할 수 없을 때 그 상황을 피하는 게 최선인 상황이라면 적어도 내적 독백 정도는 분노에 찬 일갈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소심하게 나의 옷차림을 돌아볼 게 아니라. '정신 나간 인간들이 딸뻘 되는 여자애를 능글대며 아래위로 훑어보다니, 아주 인간 구실을 못 하는구나.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한심한 족속들 같으니!'


  그러면서도 스무 살의 나는 언제나 날씬하고 가능하다면 섹시하게도 보이고 싶었다. 아저씨들 말고 내 또래 남자들의 눈에는 들고 싶었다. 잘 보이고 싶은 남자 사람이 있는 자리라면, 얼굴이 미녀는 아니니까 몸매를 어필하고 싶었다. 야하지는 않게, 하지만 가슴은 풍만하고 허리는 잘록하게 보이는 옷을 찾으려 애썼다. 사람들과 술 마시는 일 외에는 거의 모든 것에 흥미를 잃었던 20대의 나는 어찌 되었든 날씬하게 보이는 것을 큰 목표로 삼았다. 나와 키가 비슷하고 몸무게는 10kg 적게 나가는 쇼핑몰 모델이 입은 원피스는 나에게 꼭 끼었지만, 그래도 사 입었다. 상의는 헐렁하게 입어도 치마는 모두 미니스커트였다. 마침 스키니진이 유행했으니, 가슴은 꼭꼭 숨기고 다리는 나름대로 뽐내고 다닌 셈이다. 그렇게 뽐내서 뭐 좋은 일이라도 있었느냐면, 하나도 없었다. 나의 몸을 칭찬하며 다가온 남자 중에 매력적인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칭찬이 아니라 모두 추행이었다.


  나의 가슴 치수는 마지막으로 쟀을 때 80B였다. 웨딩드레스 안에 입을 끈 없는 브래지어를 사야 해서 큰마음먹고 비싼 속옷 가게에 가서 잰 것이다. 비싼 브래지어를 입어도 편하지 않았다. 요즘에는 편안하게 입을 수 있는 속옷도 다양하게 나오지만, 그때는 내가 사 본 모든 브래지어가 불편했다. 벌건 자국을 남기는 와이어와 정체 모를 레이스, 툭하면 빠지는 훅과 연결 끈, 브래지어 만드는 사람들은 이걸 안 입어보나? 이 세상 브래지어가 다 내 몸에 맞지 않는다면, 내 몸이 잘못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어질 지경이었다.


  임신과 출산으로 부었다가 가라앉은 내 가슴은 이제 '젖'이란 단어가 익숙한 모양새를 갖추었다. 수유하지 않으면 모양이 덜 망가진다는 소리는 헛소문이었다. 둥글넓적한 모양에서부터 유두와 유륜까지 노화가 팍팍 느껴진다. 평생 걸리적거리는 가슴이 중력에 이끌리며 불편한 감정을 끌어낸다. 샤워하고 나와 거울을 볼 때마다 놀란다. 시력이 썩 좋지 않아서 기미와 잡티, 주름 같은 건 잘 보이지 않는다. 물론 거울에 가까이 착 붙어서 보면 왜 안 보이겠냐마는 굳이 바라보고 싶지 않아서 대충 로션을 착착 바르고 거울 앞을 떠난다. 그러나 가슴이란 대체 무엇인가. 어째서 그리 눈에 잘 띄느냔 말이다. 거울 속 가슴에 눈길을 주면 거의 매번, 메리의 모습이 떠오른다. 양손을 번쩍 들어 귀 옆에 바짝 붙여보아도 탄력이라고는 없는 모양새다. 캐머런 디아즈의 가슴도 지금의 내 처지와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상상은 위안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20년이 지나도록 내가 배운 바가 없지는 않아서, 내 가슴을 향한 애잔한 심정을 오래 안고 있지는 않다. 거울 앞에 서서 처진 가슴과 짙어진 점, 제왕절개 흉터 따위를 바라볼 시간이 어디 있는가. 얼른 옷 입고 나가야지.


  외출 준비는 무엇으로 시작하는가? 세수나 양치질처럼 인간으로서의 기본 도리를 다하고도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가 있다. 브래지어를 착용하는 일이다. 겨울에는 내복 위에 두꺼운 후드와 점퍼를 입고 나갈 수 있지만, 날이 풀리면 어림도 없는 노브라의 자유. 등·하원 길, 잠깐 슈퍼를 갈 때도 브래지어를 챙겨 입어야 한다. 얇은 티셔츠 아래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남자들의 꼭지들을 마주칠 때도 불편한 내가 어찌 나의 꼭지를 드러내고 다닐 수 있겠는가. 니플패치는 따갑고, 민소매 브라톱은 덥다. 건널목을 달려서 건널 수 있다면 노브라도 괜찮지만, 나에게는 훅과 와이어가 없고 신축성이 좋은 브래지어의 도움이 필요하다.


  내가 원하는 건 가슴과 엉덩이가 풍만한 몸이 아니었다. 내가 원한 건 납작한 몸이었다. 옷을 겹겹이 겹쳐 입어도 여전히 날씬한 몸. 남자 사람들은 여자의 가슴이나 엉덩이의 모양과 크기에 관심이 많고, 여자들 자신도 몸매의 라인에 집착한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사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여자 사람들은 얇고 탄탄한 몸을 최고로 꼽았다. 섹시해 보이는 게 무슨 소용이냐? 내가 입고 싶은 옷을 마음껏 입고 싶을 뿐이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지만, 완성 아니라 그저 패션이라도 되려면 원하는 디자인의 옷이 내 몸에 맞아야 하지 않겠는가.


  내 사랑 빨간 머리 앤이 예뻐지고 싶다고, 아름다워지고 싶다고 소리칠 때 마릴라 아줌마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별로 예쁘지 않은 편이 훨씬 낫다. 너의 외모가 아름다우면 사람들은 너에게서 그것만 기대하지. 하지만 별로 눈에 띄지 않으면 말이다. 남들이 뭐 라건 조용히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단다. 내 말 믿으렴, 분명히 깨달을 거다.”

 마릴라 아주머니보다 빨간 머리 앤의 마음에 공감하는 나는 사진에서 턱이 두 겹처럼 보이고, 두꺼운 눈두덩이가 돋보이는 게 싫다. 특히 웃는 입이 어색해서 자꾸 입을 가리고 사진을 찍는데, 사진보다 실물이 낫다는 비겁한 변명도 그만하고 싶다. 그렇지만 내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보정 사진은 더 싫다. 얼굴은 뽀얗게, 입술은 빨갛게, 제멋대로 화장을 해주는 예쁜 사진은 더 싫다. 그런 사진으로 나를 속이려 해 봤자, 내가 보는 거울 속의 내가 달라지지 않는다. 머릿결은 날로 푸석하고 피부는 착실히 늙는다. 가슴도 더 처지겠지만 어쩌겠는가. 이제 내 몸의 목표는 날씬해 보이는 게 아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몸무게는 거의 똑같은 게 웃기다. 몸에서 진짜 중요한 건 청결과 건강이고 멋은 그다음이라는 것쯤은 잘 안다. 내 옷이 누구 눈에 들든 말든 아무 상관없이 내 마음대로 입어도 된다는 것도 아니까, 운동복 바지와 맨투맨 티셔츠만 입고 다니는 내가 마음에 든다.

요즘 나


지금의 내 스타일이 마음에 든다고 하면서도, 실은 좀 더 어려 보이고 싶다. 여전히 중요한 약속이 있는 날이면 조금이라도 더 날씬해 보이는 옷을 찾고 있다. 며칠 전 쇼핑몰에서 산 헐렁한 점퍼와 반바지 세트를 입어보면서 또 이런 생각을 한다.

'점퍼는 펑퍼짐해서 귀엽고 반바지는 깡똥해서 날씬해 보여. 잘 산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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