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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Jul 03. 2023

이름 이야기

하다 보니 구구절절

이름을 물으신다면 - 눈그린


대답해 드리는 것이 인지상정. 20년 전 싸이월드에서 내 이름과 출생 연도를 입력하면 600여 명의 명단이 떴다. 고등학교 때 옆 반에 나와 똑같은 이름인 아이가 있었는데, 친분이 없던 그 아이가 복장 검사를 할 때 내 명찰을 빌리러 와서 기분이 상했던 적이 있다. 당시 대구 시내에는 TCR이라는 음반 가게에서 회원 가입 서류를 쓰고 받은 회원증에는 ‘정수진 6’이라고 쓰여 있었으니 역시 흔하디 흔한 이름이 분명했다. 평범하고 무난한 이름이라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는 점이 흔한 이름의 가장 큰 장점일 테지만, 나는 좀 더 세련된 이름을 가지고 싶었다. ‘희수’나 ‘은서’처럼 내 기준에서 세련된 이름을 보면 '부러운데?'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곤 했다.


 살면서 많은 ‘수진이들’을 만났지만 나와 같은 한자를 쓰는 사람을 만난 적은 없다. 한글로는 평범한 이름이지만 한자는 찾기도 쓰기도 어려운 복잡한 글자이다. 어릴 때는 각각 20획과 16획인 한자를 쓸 때마다 어쩐지 똑똑해진 기분이 들어, 내 이름자에 각별한 애정을 느낄 때도 있었다. 복잡함이 곧 특별함을 의미하지는 않건만 “이것 봐, 내 이름 한자 정말 복잡하지?” 하며 친구에게 보여줄 때마다 돌아오는 감탄의 반응이 좋았다. 학교에서 단체로 도장을 주문할 때, 담임 선생님이 “수진이 너는 양심적으로 한글로 하자.”라고 말했던 일화로 완성되는 특별하고 어려운 나의 이름 자들. 이 순간에는 글쎄, 한글 문서창 한자 입력 칸에서 찾기 실패, 네이버 한자 사전의 필기 인식 기능을 열어 힘겹게 입력해야 하는 점에서 살짝 역정이 나 있다. 어릴 때 찾은 옥편에서는 ‘진주 수’와 ‘옥구슬 진’이었는데, 방금 네이버 한자 사전 검색을 해보니 ‘구슬 수(瓍), 옥돌 진(璡)’으로 나온다. 초등학교 때 학교 숙제를 하느라 아빠에게 내 이름의 뜻을 물었을 때 반짝이는 진주 구슬처럼 예쁘고 부귀하게 살라는 뜻을 담았다는 대답을 들은 기억이 난다. 진주나 옥 같은 반짝이는 보석은 내 취향이 아니지만, 고심해서 지은 이름이라는 점은 인정.

며칠 전 초록

 무난한 이름이니 그 이름에 얽힌 일화도 거의 없다. 초등학교 때 남자아이들에게 "저수지"로 놀림당하거나 중1 미술 시간에 이름 꾸미기 할 때 획을 너무 굵게 칠해서 "점수건"으로 보이게 쓴 일 정도가 있을 뿐이다. 대학 친구들은 서로를 ‘탄빵(고등학교 때부터 불린 별명으로 자기소개를 함)’이나 ‘황(평범한 이름이지만 성씨가 특이함)’ 같은 애칭으로 부르지만 나는 그저 ‘수진이’이다. 특색이 없을 바에는 다정한 느낌을 담아 ‘진이’라고 불리고 싶었는데, 동기 중에 이름이 외자로 ‘진’인 친구가 있어서 나는 ‘그냥 수진이’로 불릴 수밖에 없었다. 애칭이 없는 삶에 대한 잔잔한 아쉬움을 안고 살아가다가 문득문득 특별한 이름이 갖고 싶어질 때가 있기도 했지만, 그 마음이 진지해지는 일은 없었다.


 그러다 몇 년 전 어느 날, 처음 인터넷 사이트에 가입할 때부터 지금까지 쓰는 아이디(고등학교 때 배운 노자의 ‘무위자연’에서 따왔다)를 바꾸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포털 사이트의 메일주소를 바꿀까 했는데 번거로워서 간단히 바꿀 수 있는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바꾸기로 했다. 그날따라 이름에 생일을 붙인 단조로운 아이디가 눈에 거슬렸다. 무언가 새로운 이름이 필요해! 늦은 밤, 충동적으로 앞머리를 짧게 자르듯이 길게 고민하지 않고 인스타그램 검색창을 켜서 ‘noongreen’이라 입력했다. 검색 결과가 없음을 확인하자마자 프로필을 수정했다. 그날부터 나는 ‘눈그린’이다. 글을 쓰다 눈그린이라 쓴 지 얼마나 되었나 싶어 인스타그램 계정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무려 5년 전이었다. 새 이름을 지었지만 그건 오직 온라인에서만 쓰는 아이디였을 뿐, 남들에게 알리는 이름은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온라인 글 모임과 책 모임도 하면서 사람들이 나를 ‘눈그린님’이라고 불러주어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 서서히 익숙해져 왔다. 이름은 역시 쓸모대로 누군가에게 불릴 때 그 존재감이 완성되는 단어니까. 줌(zoom) 모임을 시작할 때 ‘안녕하세요. 눈그린입니다.’라고 말할 때마다 쭈뼛대던 말투도 요즘은 제법 자연스러워졌다.


 돌이켜보면 남들이 불러주는 별명은 없었어도 내가 만든 내 이름은 간간이 있었다. 자, 이름을 지어보세요.라는 말을 들으면 거의 반사적으로 머리에는 ‘초록’이 떠올라, 도서관에서 수업을 들을 때는 ‘새싹’이었고 기차여행 글쓰기 날에는 ‘올리브’였다. 하지만 초록 새싹이나 올리브 같은 단어들은 이미 누군가가 선점한 지 오래되었고, 나는 내 이름에 숫자나 기호를 넣고 싶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두 단어를 나란히 써서 만든 내 이름 눈그린의 noon은 ‘한낮’이나 ‘정오’이고 green은 ‘초록’이다. 내리쬐는 한낮의 태양 아래에서 반짝이는 풀잎과 싱그러운 나무의 모습을 담고 싶었다. 요즘은 사람들이 자꾸 나를 ‘눈그림’이라고 부른다. 내가 그림을 그리니까 자연스럽게 그리 부르게 되는 모양이었다. 몇 번은 ‘그림 아니고 그린이에요’ 하며 정정해 주었는데 요즘은 그냥 그것도 괜찮다 싶어 놔둔다. 오랫동안 내가 그린 인물의 얼굴에는 눈이 없었는데 ‘눈그림’으로 불리는 것도 재미있고, 내 눈으로 보는 그림이 나의 세계가 되는 거니까 그 의미도 멋지다고 잘못 불린 이름에도 의미를 부여해 본다.

역시 초록 자주

 쿨하게 마치려다 떠오른 김에 미술 시간에 만든 ‘점수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본다. 이름 석 자를 스케치북 가운데에 크게 써서 글자를 꾸미는 날이었다. 학교 미술 시간은 늘 힘들었다. 오래 고민해서 잘하고 싶은데 수업 시간이 항상 부족했다. 꼭 한두 장 스케치북을 찢게 되고, 시간이 부족해지면 허둥지둥하다가 미술 교과서에 있는 그림을 따라 그렸는데 그마저 잘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름 꾸미기’를 시작할 때는 자신 있었는데, 하다 보니 어쩐지 옆자리 친구와 비슷한 디자인이 되어갔고, 그 친구가 멋지게 완성해 가는 걸 보니 내 이름은 허접한 아류작으로 느껴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수업 시간이 끝나, 다음 시간까지 완성해서 발표하는 걸로 미술 숙제가 되었다. 집에 와서 성실하게 다시 했으면 좋았으련만, 만사가 귀찮아진 나는 자를 대서 두껍게 이름을 쓰고 모서리만 살짝 둥글게 다듬은 후에 몽땅 초록색으로 칠해버렸다. 디자인도 꾸밈도 없었다. 교실 벽에 흔히 붙어 있는 ‘게시판’이라는 글자처럼 아무런 특색이 없었고 초록색 포스터컬러마저 얼룩덜룩 지저분하게 칠해졌다.


 미술 선생님은 모두의 작품을 칠판에 세워 하나씩 평가했는데, 성의 없는 내 과제에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큰소리로 ‘야, 정수진! 점수건 아니야?’ 하는 바람에 아이들이 다 함께 웃은 순간, 나는 얼굴이 벌게졌다. 아이들 앞에서 못난 숙제를 내보인 민망함과 무수히 반복해서 말하고 써온 내 이름을 잘못 써서 웃음거리로 만들었다는 부끄러움이었다. 내가 내 이름에 담고 싶었던 어떤 고유함을 망쳐버렸다는 낭패감! 남들과는 다르게, 누구보다 특별하게 이름을 꾸밀 거라 속으로 의기양양했던 결심이 떠올라 엉망진창인 스케치북을 당장 벅벅 찢어버리고 싶었다.

초록 신갈나무

 내가 불릴 이름을 지을 때는 당연히 나의 취향과 개성을 넣고 싶다. 그러나 인터넷 페이지에서 아이디를 정할 때는 무엇보다 ‘중복 확인’이 중요하다. ‘초록’이 들어가는 이름을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 세상에 얼마나 많은 ‘green’이 있을지는 뻔하니까 실패하면 새 이름을 찾아 써야겠다고 미리 다짐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사람들이 나처럼 근본 없는 합성어를 만들지 않아서, 나 혼자 ‘noongreen’ 일 수 있었다. 열네 살에도, 마흔한 살에도 여전히 나만의 특별한 이름 꾸미기에는 초록을 넣고 싶은 나를 향해 길고 길게 써 본 이야기.


*덧붙이는 말

마흔한 살 수진이는 도서관 수업에서 이름 꾸미기를 할 때, 초록색 덩굴과 꽃잎으로 예쁘게 장식해서 박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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