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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Jul 19. 2023

내 것이 아닌 불안

그 사람 이야기

여름방학 때 할머니의 방에서 뜯어진 편지 봉투를 발견했다. 봉투 겉면에는 학교 경필대회(애국가를 4절까지 손글씨로 반듯하게 써내는 대회)에서 1등 상을 받을 만한 글씨체로 주소가 쓰여있었다. 발신지가 교도소였기 때문에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어머니께"로 시작하는 편지에는 절절한 반성과 다짐이 반듯한 정자체로 쓰여있었다. 그 편지를 읽으며 나는 얼마나 안도했던가. 큰고모와 엄마의 대화가 떠올랐다. 형님이 더 좋은 변호사를 써주지 못해서 징역을 살게 되었다고, 면회실에서 살기 등등한 눈빛으로 아빠를 노려보았다던 삼촌 이야기, 여기서 나가면 형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다던 무서운 이야기 말이다. 그런 삼촌이 참회의 눈물을 담은 편지를 보내다니, 이제는 새사람이 되었나 보다. 편지지를 곱게 접어 다시 봉투에 넣었다.


 명절에나 만나는 삼촌은 낮에는 없는 듯 지내다가, 밤에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렸다. 정확한 상황을 알 수는 없었지만, 술에 취해 고함을 치고 물건을 집어던지다가 비틀대는 걸음으로 사라지곤 했다. 어찌나 운이 좋은지, 만취해서 운전하면서도 사고 한 번 나지 않았다. 어떤 때 삼촌은 그나마 괜찮은 사람이 되어 농사일을 도와주고 형님 부부와 사이좋게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자기 기본값을 ‘술주정뱅이’로 설정해 둔 것인지, 술에 취해 형에게 폭언을 내뱉는 일은 그만두지 않았다. 엄마 말대로 ‘술만 안 마시면 새색시처럼 얌전한 사람’은 내가 어떤 종류의 애착도 느끼지 못하는 아빠의 남동생이다.


 아빠는 삼촌보다 3살 많은 형일뿐, 부모가 아닌데 어째서 끝없이 동생을 참아주는 것인가. 자기 자식에게는 전혀 관대하지 않은 사람인데. 형수의 예물을 훔쳐서 팔고, 사고를 치면 합의금을 내달라고 하는 동생. 제대로 된 일을 열심히 하지도 않고 단 한 번도 사과하지 않는 동생의 말을 언제까지 들어줄 것인가. 아내와 자식이 먼저이지 않은가? 그런 삼촌이 집에 오면 어떻든 예의를 갖추어서 대하라는 아빠의 말이 어이가 없었다. 부끄러운 줄 모르는 삼촌은 말할 것도 없고, 남들 보기 부끄럽다는 부모님의 말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삼촌의 흠이 어째서 나에게까지 ‘부끄러운 집안일’이 된다는 것인지. 설혹 내가 그렇게 느끼더라도 ‘네가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다.’라고 정리해 주었어야지.


 결혼 후 첫 추석날 밤, 부모님과 여동생, 남편과 내가 둘러앉아 맥주를 한잔하고 있었다. 한 갈래인 마을 길로 자동차 한 대가 올라왔다. 마을 공터에 멈춘 차는 헤드라이트를 밝히고 경적을 마구 울렸다. 남편을 제외한 가족의 눈빛이 불길함으로 흔들렸다. 잠시 후 쾅쾅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보소!” 아빠는 허둥지둥하며 삼촌을 마을 정자로 이끌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남편(삼촌에 대해서 다 알고는 있었다)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나는 아빠의 겉옷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남편은 따라나서는 내가 의아한 얼굴이었고, 엄마는 얼굴을 찌푸리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을 정자에 앉은 아빠와 삼촌이 가까워지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삼촌은 나에게 집에 들어가 있으라고, 형님과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지만 나는 아빠에게 옷을 건네주고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긴 세월 삼촌의 행실을 이해할 만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조그만 가능성을 놓지 않았다. 이제야 삼촌이 아빠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지나 않을까 기대도 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삼촌은 40년 전의 서러움과 자기를 내놓은 자식 취급한 부모에 대한 원망, 뻔하기 짝이 없는 돈 내놓으라는 이야기를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읊어댔다. 들어야 할 말은 단 하나도 없었다. 아빠는 나중에 술을 마시지 않고 찾아오라는 말을 반복했고, 삼촌의 주정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쿵쾅대는 심장에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힘을 주어 말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데요? 아빠한테 왜 이러시는데요?”


 드디어 삼촌이 입을 다물었다. 놀란 듯했다.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더니, 나더러 또 집에 먼저 들어가라고 했다. “아니요. 아빠랑 같이 들어갈 건데요. 아빠, 이제 집에 가자.” 할 수만 있다면 삼촌에게 쌓여있는 말을 다 쏟아내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는 없었다. 삼촌은 이번에도 음주운전으로 집까지 잘 돌아갈 모양이었다. 집에 돌아와 김이 다 빠진 맥주를 마시며 나는 상종도 못 할 인간이라고 쌍욕을 뱉어냈다. 분명히 큰 사고를 칠 테니 다음에는 무조건 경찰을 부르라는 당부도 했다.

“이제 설까지는 조용하겠지. 내가 김 서방 보기 부끄럽다.”

아빠가 민망한 얼굴로 말하자 남편 역시 멋쩍은 표정으로 ‘아닙니다.’ 했다. 부끄럽기는 무엇이 부끄럽다는 말인가. 아빠는 여전히 동생을 자식처럼 여기고 책임감에 수치를 느끼고 있었다.


 그다음 해 여름이 다가올 때쯤 나는 임신 중이었다. 아침부터 전화한 엄마가 또 친척들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시골에 좀 와줄 수 있냐고 했다. 삼촌이 자꾸 전화해서 아빠가 많이 불안해하는데, 혹시 지난번처럼 찾아오면 아빠 옆에 있어 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 순간 나는 폭발해서 소리를 질렀다. “나 지금 임신 중인데 그런 일까지 내가 신경 써야 해? 경찰을 불러!”

나는 전화를 끊고도 한참이나 씩씩댔다. 상식적인 부모라면 임신한 딸이 안 좋은 꼴을 볼까 염려해야 하지 않나?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해결해 줄 수 있단 말인가? 한동안 나는 삼촌을 직접 찾아가 담판을 지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내가, 도대체, 왜?

 부모님은 근래에 들어서야 드디어 삼촌을 끊어냈다. 모두가 불안에 떨던 대로, 삼촌은 기어코 어느 날 새벽 부모님의 생명을 위협하기 위해(만취 상태로 휘발유를 가지고 와서 불을 지르겠다고 했단다) 찾아왔다고 한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러서야 아빠는 경찰을 불렀고, 비열한 악당이 늘 그러하듯, 고분고분 경찰서에 끌려간 삼촌은 더 이상 시골집에 찾아오지 않는 듯하다. 아빠가 전화와 문자를 차단했지만 아마 그 이후에도 주정뱅이의 전화는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 후로 나는 엄마가 때때로 전하는 고모와 삼촌 소식에 불안과 호기심을 억누르며 냉소로 답한다.

“안 궁금하니까 그만 이야기해.”

친가 친척들의 소식에 내가 극단적인 불쾌감을 표현하는 이유는 위협당한다는 기분 때문이다. 내 가족이 친척들 때문에, 삼촌에 의해 무너진다는 느낌, 내 힘으로 지킬 수 없는 무력감에 대한 좌절과 분노. 나는 쉽게 그때의 감각으로 돌아간다. "친척들 장례식은 갈 테니까, 그때는 말해줘. 어떻게 지내는지 이런저런 이야기 듣고 싶지 않아."라고 무례한 말들로 선을 긋는 것은 어렸던 나를 위해 어른인 내가 해주는 말이다.


 애써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단숨에 떠오르는 공포의 순간들. 그 불안은 내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어른들이 조금 더 아이 앞에서 말조심해 주었다면, 삼촌이 어린 조카들이 지켜보는 상황을 인지하기라도 했다면, 명절과 제사가 다가올 때마다 가슴이 쿵쿵 내려앉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전을 구우며 편두통에 시달리는 엄마에게 진통제를 건네주며 끝없는 할머니, 고모, 삼촌에 대한 푸닥거리에 맞장구를 칠 필요도 없었겠지. 명절에 친정보다 시가에 더 오래 머무르고 싶은 특이한 며느리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잘 지내던 시기에 마음 약한 엄마는 삼촌을 가엾게 여겼고, 아빠는 삼촌의 개과천선에 감동했었다. “너네 할머니가 생일을 한 번도 안 챙겨줬다더라. 생각해 보면 명절 때 다들 놀고 있고, 나 혼자 음식하고 있을 때 도와준 유일한 사람이 삼촌이다.” 엄마의 말에 아빠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 안 변한다고 하지만, 요즘 삼촌 보면 정신을 차렸는가 싶다.” 그때도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한 건 나뿐이어서 엄마 아빠에게 진지한 충고를 했었다. “잠깐 잘 지낸다고 옛날 일을 잊으면 안 된다. 사람은 정말 안 변한다. 언제든지 뒤통수 맞을 수 있으니까 믿지 마.” 역시, 내 말이 맞았다.


 내 불안만 다스리기에도 벅차고, 걱정거리 챙기기에도 바쁘다. 전화벨 소리마다 긴장하고, 늦은 밤 도로에서 큰 소리가 들리면 가슴이 철렁한다. 건강검진을 앞두고 소화 불량이 큰 병의 전조는 아닌가 겁이 나고,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심장이 두근두근 방망이질을 시작한다. 요즘 부쩍 신경질적인 표현이 늘어난 아이를 볼 때 나를 닮아 매사 예민하게 화를 많이 내나 싶어 불안하다. 매사 느긋한 남편 몫까지 이것저것 집안일을 챙겨야 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까지 하려니 불안에 떠는 것도 시간을 쪼개야 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 부모의 불안까지 떠안고 살아갈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애당초 그것은 내 불안이 아니었다. 한 번도 내 불안인 적은 없었다. 이 불안의 정체를 알기에 이제는 ‘삼촌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로 고민하던 시간에 작별을 고한다. 사실은 이런 글을 쓸 때마다 내가 평생 부모 탓이나 하는 못난이로 남을까 봐 불안하지만 머리와 심장을 파고드는 끈끈한 불안을 세네카의 편지로 달래 본다.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어”라고, 그렇다면 그대는 이미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고, 그것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이 세상에는 일어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없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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