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눈그린 Aug 22. 2023

원망도, 애정도, 미움도

언덕집 아주머니 이야기




 여름방학이라 올케와 조카가 놀러 온 김에 부모님도 초대해 외식을 했다. 점심 특선으로 적당한 가격에 복어 요리가 한상차림으로 나오는 가게를 골랐다. 음식맛은 그저 그런 편이지만 놀이방 시설이 넓어서 선택한 곳이었는데 부모님이 음식을 맛나게 드셔서 뿌듯한 참이었다. 엄마 아빠는 몇 번이나 메뉴와 가격, 친절한 직원과 쾌적한 홀에 감탄하며 동네 어르신들을 모시고 오자고 했다. 시골에는 이만한 식당이 없어 매번 고깃집 아니면 횟집만 가서 질리는데, 어른들이 여기 오면 얼마나 좋아하시겠냐고. 다음 경로당 모임 때는 반드시 여기로 오겠다고 했다. 나는 ‘점심특선’ 가격을 강조해서 알려주었다. 괜히 부모님의 주선으로 먼 길을 왔다가 사람들이 실망하면 낭패니까. ‘모두 노인들이라 저녁에는 먼 길 나서지 않는다.’라는 아빠의 말에 머쓱해졌지만.


 엄마는 좋은 게 있는 줄도 모르는 시골 어르신들을 안타까워한다. 우리는 대도시에 오래 살았고, 아빠가 운전을 할 수 있고 자식들도 그리 멀지 않은 도시에 사니까, 내키면 맛집도 찾아가고 세련된 카페에 커피를 마시러 나갈 수도 있지만 이웃들은 그러지 못한다고 불쌍해한다. 나의 고향은 산촌에 가까운 농촌으로 신호등 하나 없는 작은 깡촌이다. 평생 버스와 경운기를 타고 5일 장에 다닌 어른들이 대부분이라 요즘도 경로당 단체 외식을 하면 귀농을 한 젊은이(60대 이상)들과 엄마가 식당을 고르고, 운전자가 있는 두세 집의 차에 나눠 타고 나들이를 다녀온다.


 언덕집 아저씨가 편찮으셨던 긴 세월 동안 우리 집에 무언가 색다르고 맛난 먹거리(올케가 보내준 해산물이나 내가 사가는 디저트 같은 것들)가 생기면 엄마 아빠는 꼭 먼저 챙겨드리곤 했다. 어느 날 음식(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대수롭지 않은 종류였을 게다)을 갖다 드렸더니, 아저씨가 “세상에 이렇게 맛난 게 있노. 평생 이리 맛있는 건 먹어본 적이 없다.” 하는 바람에 엄마는 눈물이 핑 돌았다고 했다.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앞이 잘 안 보이고, 기력이 쇠한 노인이 산해진미도 아닌 음식에 감격하는 모습이 떠올라 나도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언덕집 아주머니는 경로당 모임 때마다 살뜰하게 남편의 음식을 챙겼다. 때로는 과할 만큼 육회를 포장하고, 당연한 듯 다른 사람에게 음식 포장을 시키는 바람에 동네 사람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지만… 작년에 아저씨가 돌아가셨으니 이제는 그럴 일도 없다. 물론, 아주머니의 엄청난 식탐 이야기는 엄마를 만날 때마다 업데이트되고 있지만, 중요한 일은 아니다.


 언덕집 아주머니는 엄마의 이야기에 자주 등장한다. 아주머니는 염치없는 부탁, 눈치 없는 참견, 끊이지 않는 말실수로 엄마의 신경을 긁는가 하면 웃음도 눈물도 많은 여린 성정으로 엄마의 동정심을 자극한다. 엄마는 평생 가까운 이웃으로 살아야 하는 상황에 가슴을 치며 안 보고 살고 싶다고 이를 갈다가도 하룻밤만 지나면 ‘불쌍한 아주머니를 챙겨주던 사연’을 꺼내 나를 당황하게 했다. 전에는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불쌍해하든지 미워하든지 하나만 하라’고 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하며 듣는 이야기들.

 나에게는 그저 어릴 적 언덕집에서 베지밀과 알사탕을 팔던 어른일 뿐인 아주머니 이야기를 이렇게 쓰고 있는 건, 지난번 시골에 다녀온 후 아주머니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서이다. 아저씨가 돌아가신 후에는 혼자 사는 아주머니가 한동안 밤마다 울어서 엄마가 지켜봤다던 이야기도 자꾸 떠올랐다. 내가 아이를 데리고 시골에 가면 반드시 마주치는 아주머니(집도 가깝지만, 아주머니의 집을 지나쳐야 사과밭에 갈 수 있다)는 여름이를 보면 큰 소리로 부르면서, ‘할매집에 놀러 온나! 할매가 곶감 줄까? 이리 와봐라. 과자 줄게!’ 하시는데, 간식 귀한 줄 모르는 요즘 아이인 여름이는 도무지 낯선 할머니에게 가려고 들지를 않는다. 기껏 할머니 앞에 가도 간식만 쏙 받아서 돌아설 뿐, 전혀 같이 놀 생각은 없는 것이다. 아주머니는 여름이를 예뻐하고 귀여워하며 장난도 치지만, 여름이는 장단을 맞추는 일 없이 매번 내 손만 잡아 이끈다. 나는 아주머니 얼굴을 봐서 잠깐 아이를 설득하긴 하지만, 아이만큼 나도 불편해져서 “또 올게요. 인사해야지?”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름이는 친하지 않은 할머니가 “곶감 줄 테니 저기 밭에 외할머니에게 갖다 줘라.”라고 심부름을 시키는 상황이 못마땅했는지 집에 와서도 입이 부루퉁했다. 어린아이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보다는 아이에게 이런저런 퀘스트(?)를 시키고 지켜보고 싶어 하는 옛날 어르신의 친근감 표현 방식은 나도 불편하기 마찬가지여서, ‘그 할머니는 좋은 사람이야.’라고 하는 정도로 상황을 정리했다. ‘아이고, 아주머니, 저도 웬만하면 같이 있고 싶었는데요.’ 혼자 속으로 웅얼거렸다.


 다음날 새로 다듬었다는 문중 산소(이해할 수 없는 풍습이지만 늙은 아빠가 기뻐해서)를 구경 갈 때, 아이 목소리를 듣고 또 밖으로 나온 아주머니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여름이를 불렀다. “저기 갔다가 올게요!” 내가 씩씩하게 대답하고 언덕길을 지나쳐 오르는데, 집 벽에 기대선 아주머니가 한참이나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좀 있다가 꼭 온네이!” 하는 그 모습에 왜 눈물이 날 것 같았는지... 사실 아주머니의 얼굴이 매번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도록 손을 흔드는 엄마의 모습만큼 애달플 것도 없었는데 말이다.


 한참 아주머니를 떠올리다 찾은 기억은 몇 년 전 보건소에서 한 치매 검사 일화였다. ‘하도 헛소리를 많이 해서 치매인가 걱정스럽다’면서 엄마가 아주머니에게 치매 검사를 권했다고 했다. 치매라는 소리에 펄쩍 뛰던 아주머니에게 보건소 선생님이 일흔이 넘으면 한 번쯤 검사가 필요하다고 설득했단다. 검사를 했더니 다행스럽고 당연하게도 치매가 아니었고, 계산을 비롯한 여러 부분에서 상당히 똑 부러지는 모습을 보여 엄마가 더 놀랐다고 했다. 엄마가 결과지를 내밀며 감탄과 칭찬을 하자 아주머니는 어린아이처럼 뿌듯해하다가 말했다고 한다. “나는 어릴 때 정말 똘똘했는데 부모님이 여자애라고 학교도 아예 안 보내줬다. 그게 지금도 원망스럽다.”

엄마는 아주머니가 역시 불쌍하다고 했고 아빠는 코웃음을 쳤다. 부모님 돌아가신 지가 언제며 나이가 일흔이 넘어서는 아직도 부모를 원망하고 탓하는 게 더욱 어리석다면서.


 아이를 낳고 한창 부모님에 대한 미움과 지난 세월에 대한 원망이 깊어질 때였다. 아직도 그때가 다 지나가지 않았지만, 그때는 어린 시절의 울분을 지치지도 않고 일기장에 써대던 시기였다. 아주머니 이야기를 듣다가 앞날이 막막하고 머리가 아득해졌다.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구나. 시간이 지나며 저절로 옅어지든, 더 짙은 일들로 덮어가든, 내 안에서 해결하지 않은 문제는 내 나이 70에도 한으로 남아 있을 뿐이구나. 나는 할머니처럼 괴팍해질 수 있고, 엄마처럼 피해의식에 사로잡힐 수 있고, 아주머니처럼 평생 부모를 원망할 수 있었다. 아빠처럼 부모님은 무조건 좋은 추억으로만 간직하며 진실로부터 눈을 돌리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나의 미움과 분노를 어떻게든 다스릴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절박함을 느낀 순간이었다. 그날 휴대폰 메모장에 이렇게 썼다. ‘노인이 되어서도 부모탓을 하는 나에 대한 공포’

작가의 이전글 나 보지 말고, 거울부터 봐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