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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Nov 16. 2023

지팡이와 뒷모습

시답잖은 감성이지만 응원을 담아


한국 현대 문학에서 엘리베이터와 닫힌 현관문은 삭막한 이미지로 급격한 도시화, 현대인의 단절의 표상이었다. 평생 주택에서만 살아온 내가 국어 문제집에서 박완서 선생님의 단편'옥상의 민들레꽃'을 너무 많이 읽어 더욱 굳어진 관념이기도 하겠다. 나는 주말 오전 창밖을 볼 때마다 '모두 집안에 있나? 아니면 모두 어디론가 떠나버렸나?' 하며 괜한 쓸쓸함을 느끼기도 하고.


아파트에 산 지도 7년 차. 아이가 유치원생이니 놀이터에 나가면 어머, 안녕하세요. 를 주고받으며 지낸다. 등하원 시간에 마주치는 아이들 얼굴이 눈에 익어 아파트 밖에서 인사를 주고받기도 한다. 다시 유치원생이 되고 싶다던 1학년 남자아이, 어느새 훌쩍 커버린 14층 남매들이 떠오른다. 아이가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엄마들과는 매일 등하원 때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놀이터에서 만난 엄마들과는 추위와 더위를 함께 견디며(?) 우정을 쌓아가고 있다.



신도시라 해야 하나, 계획 개발 구역인 아파트 동네에는 아이들이 많은 대신 어르신들이 별로 없다. 아파트 경로당에 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일하시는 분들 휴게소로 용도 변경을 했을 정도다. 그래서 자주 마주치는 같은 어르신들은 아이들보다 기억에 잘 남는다. 여름이가 어린이집에 다닐 때, 늘 같은 시간에 마주치던 분이 있었다. 꽤 오랜 기간 휠체어에 앉은 모습을 보았는데, 지난해에는 돌봄 선생님의 도움으로 천천히 걸어서 현관을 나서는 모습을 보았다.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친분은 없으니 혼자 뭉클하고 말았다. 그 후에는 여름이의 등원 시간이 당겨져 한동안 마주치지 않다가 어느 날 저녁, 혼자 지팡이를 짚고 서서히 걷는 어르신을 마주치고 인사를 건네는데 뭔 주책없게 콧날이 시큰하고 난리.


온갖 생각이 다 지나갔다. 유심히 바라본다 느끼면 기분이 나쁘실 것도 같고, 엘리베이터 앞 좁은 현관에서 내가 휭 하니 지나가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뒤에서 걸으면 그분이 나를 신경 써서 불편하실 것도 같고... 자연스레 행동한답시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나의 기운(?)이 더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에 인사를 하고 쭈뼛댔던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언제 어느 순간이든 내 생각 안으로 빠져드는 나라는 인간이 좀 한심스럽기도 했는데...

올해 여름이와 다니는 시간대에는 또 다른 어르신의 산책 시간이 겹쳤다. 여름철부터 보조기에 의지해 현관 앞을 조금씩 걸으시다 바람길에 앉아 한참씩 쉬고 계시는 날이 많았다. 어르신이 거기 앉아 계시고 나는 여름이와 킥보드나 자전거를 타고 그 앞을 오가니, 자연스레 인사를 주고받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하고 여름이에게도 인사를 시키니 인사를 받아주셨다. 오늘 덥네요. 하거나, 꾸벅 목례만 할 때도 있고 여름이가 멀리서 인사를 할 때도 있었는데, 매번 희미하게 웃어주시는 눈빛이 좋았다.


입동이 되자마자 겨울바람이 불어 이제 앉아계시기는 힘들겠구나, 싶었는데 오늘 오전에 어르신의 뒷모습을 보았다. 오랜만에 아무런 일정이 없어서 한의원에 갔다가 한 시간을 걷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1층 현관에 들어가려는데, 저쪽 끝에 어르신이 양쪽에 지팡이를 잡고 천천히 걸어가고 계셨다. 보조기가 아니라 지팡이! 느리지만 분명 힘이 들어간 걸음걸이였다. 아, 힘을 내고 계셨구나. 뒤에 서서 마음으로 응원을 보냈다. 많이 좋아지신 것 같아요. 바람이 찬데 걸으러 나오셨네요. 혼자 속으로 '힘내세요!'를 외치고 또 제풀에 주책을 떨며 눈물이 나려 해서 급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다.


힘을 내기가 정말 힘이 들 때도, 사람들은 힘을 내면서 살아가고 있구나. 힘내서 잘 살아야지. 그런 얄팍한 깨달음을 얻으며, 한동네 어르신들의 쾌유를 빌어본다. 비는 마음이 얄팍하지는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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