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1)

아들로 살아간다는 것(7)

by 소방관아빠 무스

(사진 출처-네이버 블로그 '근대사 이것저것 모으기')


울엄마 얘기를 이렇게까지 많이 했으니 이젠 아버지 얘기를 안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해해 달라, 엄마는 울엄마라고 불러 놓고 아버지는 아버지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나의 마음을... 나는 아버지를 아빠라고는 절대로 부르지 못하는, 뼛속까지 타고난 데다 그렇게 교육받은 경상도 남자일 뿐이다.-


아버지는 한반도 남쪽에 있는 남자들의 섬에서 태어나셨다. 바로 남해라는 섬 말이다. 아버지는 그 남해 출신이셨다. 할아버지는 남해에서 그나마(?) 뼈대 있는 집안의 장손이셨다. 아버지 말에 의하면 제법 땅마지기나 있는 부잣집이었다고 하셨다. 그런데 아버지가 태어나고 난 지 얼마 안돼서 우리 집안을 풍비박산으로 만들어 버린 사건이 일어난다. 할머니가 배 사고로 돌아가신 것이다. 그곳이 섬이다 보니 배로 이곳저곳을 왕래하는 일이 많았는데 장에 다녀오시던 할머니가 탄 배가 침몰하면서 돌아가신 것이다.


졸지에 사랑하는 부인을 잃은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잊지 못하고 그날부터 술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시작하셨고, 그러자 그 많던 전답들도 다 날려먹고 급기야는 아버지마저 다른 사람 집에 일하러 가는 신세가 되셨다고 한다. -보통 이와 비슷한 스토리들을 들어 보면 도박, 사기, 사업실패, 주색잡기 등으로 이렇게 흘러가는 경우가 많은데 할아버지의 스토리를 들어보면 나름 그 시대의 순정파(?)이셨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아버지가 그 사건으로 인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6~70년대에 맨주먹 하나로 도회지로 향하던 농촌 총각들의 대열에 합류해서 부산으로 올라오셨고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부산 처녀인 울엄마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여기서 아버지와 울엄마를 이어준 사람은 부산에 먼저 올라오셔서 터를 잡고 있었던 고모였는데 거기에 관련된 러브스토리(?)는 다음에 기회 되면 쓰련다.)


아버지와 엄니는 전편에서 얘기한 아미동으로 오기 전에 부산의 용당, 적기(?)라는 곳에 신접살림을 차리셨다고 하는데 난 부산에서 여태껏 살아왔지만 적기라는 곳이 어딘지 지금도 정확히 알 수가 없고 -요즘은 거의 쓰지 않는 지명이라 그런 듯~- 그곳에서의 기억도 전혀 없다. 하지만 그곳에서 내가 태어났다고 하니 정확한 나의 고향, 아니 출생지는 아마도 부산 적기가 될 것 같다.


아버지는 그때 그곳에 있었던 동명목재라는 곳에서 일하셨다는데 -종종 옛날 신문을 찾아보면 동명목재는 동남아시아의 원목들을 수입해 합판으로 가공하는, 당시 굴지의 대기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과일 행상을 하기도 하셨고 배를 타기도 하셨고... 하다가 결국 '(주)해태제과'라는 곳에 취직을 하셔서 20년 이상 근속하셨다. 해태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정도로 롯데와 쌍벽을 이루는 제과업계의 쌍두마차였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속칭 '까데기'라는 일을 하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말하는 '택배 상하차'와 비슷한 일이었다. 공장에서 생산한 과자나 아이스크림 박스들을 차에 싣고 내리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잘 아냐 하면 대학생 때 아버지 회사에서(아버지 회사라고 얘기하니까 당시에 우리 아버지가 회사 사장님인 줄 아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아버지와 같이 근무해 봤기 때문이다.- 요즘은 그 택배 상하차 작업이 알바 중에서도 무척 힘들어 반나절만 일하고 도망간다는 소문이 나 있지만 당시에 나는 팔팔한 20대여서 그런지 하루종일 그 택배 상하차 일을 해도 그다지 힘든 줄은 몰랐었다. 오히려 더운 여름 방학 때 아이스크림 냉장고 창고에 가서 물건을 꺼내와서 차에 실을 때면 시원하기도 하고 일이 끝나고 나면 박스에 들어 있는 아이스크림을 몇 개 꺼내 먹기도 하며 오히려 재밌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20년 동안 이 일을 하셨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론 감사하고 한편으론 또 짠한 마음도 들었다. 그래서 어릴 적 집에 오시면 나하고 놀아주지도 않고 바닥에 어깨만 닿으면 잠들어 버리시던 아버지 모습이 이제야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해태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바로 해태와 롯데의 라이벌 전이었다. 당시 우리가 살던 아미동 근처에는 구덕운동장이라는 야구장이 있었는데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는 프로야구 경기를 그곳에서 했었다. 아버지가 (주)해태제과에 다녔던 나는 당연하게도, 아니, 반강제적으로 해태 타이거즈의 어린이 팬클럽에 가입했고 거기서 주는 가방과 점퍼와 모자와 유니폼을 입고 학교에 가곤 했다. 학교에선 뭐 딱히 특별한 일이 없었다. 모두가 롯데 일색이던 아이들 앞에서 약간 튈 수 있어서(?) 나름 부러움의 시선도 받곤 했다. 하지만 야구장에 가면 얘기가 달라졌다.


그날은 아버지 회사에서 회식차(?) 야구장 응원을 가게 된 날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 회자의 팀장님(?)쯤 되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겠지...


"내일 회식은 구덕운동장에서 한다. 내일 롯데하고 중요한 경기가 있으니까 무조건 쪽수가 많아야 돼, 그러니까 가족들 데리고 오고 싶은 사람은 다 데리고 와!, 대신 내일 먹을 건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책임질게!"


아마도 이러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아버지는 야구를 좋아하는 나(당시 초등학교 4학년)를 데리고 처음으로 구덕운동장에 갔던 것이다!


그날의 스토리는 아마도 1980년대의 프로야구 팬이라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984년은 해태의 우승 독주 속에 유일하게 롯데가 우승한 해였고 해태와 선동렬과 롯데의 최동원이 쌍벽을 이뤄 2-2의 무승부 경기를 펼친 해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하면 해태의 우승독주를 더는 못 봐주는 갱상도(?) 사람들이 '이제는 우리도 한번 해보자!'고 들고 일어난 해였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온통 푸른 거인깃발이 나부끼는 그 스타디움에 유일하게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칠해진 호랑이 깃발을 들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조그만 꼬마까지 앞세우고 등장했으니 사람들의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처음엔 순조로웠다. 롯데가 앞서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도 첨엔 사람들의 야유와 함성에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아~야구장이란 게 이런 거구나, TV에서 볼 때보다 데시벨(?)이 조금 높기는 하네'라고 생각하면서 공장장 아저씨가 박스에 바리바리 싸 온 '해태' 오징어땅콩을 씹으면서 야구를 관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해태가 점수를 내고 롯데와 동점이 되었을 때, 점점 그 야유와 함성이 우리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저 XX들 뭐고? 여기가 어딘지 알고 온 기가!"


어른들의 술에 취한 혀가 점점 꼬여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말이야, 여가 전라돈지 알고 있나, 저 호랑이 그림은 또 뭐꼬?"


그러다가 해태의 한방으로 경기가 역전되었을 때, 구덕운동장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대신 불화살이 우리에게로 날아왔다. 욕설과 야유가 점점 더 심해졌다.


"아따, 야구 보면서 이 뭐 하는 짓들인교?, 여기 아도 있는데!"


(주)해태제과 남자 직원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있는데 그래도 경리 누나가 대차게 롯데 팬들을 향해서 외쳤다. 그러자 또다시 야유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뭔가가 날아들었다.


"아, 마 고마하래이, 안 되겠다, 나가자..."


당시 유명 코미디언이었던 이주일 아저씨처럼 머리가 벗겨진 팀장님이 난처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겨우 호랑이 깃발을 감추고 야구장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모처럼 오징어 땅콩을 원없이 먹을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그리고 야구장을 가는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게 된 것도 아마 이 사건 이후였던 것 같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은 다음편에서 계속됩니다.)